북리뷰 l [감동여정] 어부아내들 달빛노래에, 괴테가 취한 밤

 북리뷰 l [감동여정] 어부아내들 달빛노래에, 괴테가 취한 밤

기자명 더뷰스 

달빛에 젖으며 스러지는 노래의 몽환에 괴테가 빠져있을 때, 늙은 하인이 리도 출신 여자들의 노래가 좋다고 얘기하면서 이런 얘길 해준다.

"남정네들이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가면, 저녁 때 아낙들이 바닷가에 앉아 멀리 퍼지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저 멀리에 있는 남편들은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한답니다.“

아침에 TV를 켰다가, 2018년 언론사 논설실장 시절에 올렸던 ‘유튜브 영상’ 하나가 초기화면 추천 영상 맨 첫 자리에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영상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나로서는, 반갑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이 벼락 출세를 할 수 있구나 하며 잠깐 웃었다.

영상은, 정숭호 작가의 ‘가보지 않은 여행기’를 읽고 몹시 감동하여 그 독후감(讀後感)을 정리한 글과 관련 이미지들이었다. 이 참에 그와 관련한 콘텐츠를 소환하여 그 감격을 다시 나누고 싶어졌다.


1.새로운 여정을 개척한 '독서여행자'

가보지 않은 여행기. 이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 혹은 모순어법이다. 여행(旅行)은 집을 떠난 사람(旅)이 걸어가는 것(行)을 전제하고 있기에, 가보지 않은 여행은 있을 수 없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상상(想像)이라는 무소부지(無所不至)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행위가 가능하고 그것을 기록할 수도 있다. 상식의 궤도를 이탈할 수 있는 상상과 추리의 능력이, 가비얍게 모순을 극복하는 일이라고나 할까.

단순히 그런 기이한 기록을 세우기 위해, 모순을 극복하는 일이라면 잠깐 박수를 쳐주면 된다. 그런데, 그 여행에서 포착한 무엇이 진짜 기록을 거듭 뛰어넘고 있으며, 여행과는 또다른 감성과 상념의 여정을 제시한다면, 이건 다른 문제다.

가보는 여행이나 가본 여행보다 가보지 않은 여행이 자아내는 감동과 생생함의 영역이 특출하고 각별할 때, 이 기록자야 말로 ‘새로운 여정(旅程)을 개척한 선구(先驅)로 자리매김할 만하지 않은가.


2.텍스트의 텍스트의 텍스트를 열고 들어가는 탐험

우리는, 독서를 책 속으로 걸어가는 하나의 여행으로 은유하기도 하지만, 그 독서가 페이지를 뛰쳐나와 창조에 근접할 만큼 개성적이고 새로운 영감(靈感)으로 진행될 때, 이걸 은유가 아닌 진짜 여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재건축이 아니라, 상상의 신축(新築)이다. ’가보지 않은 여행기‘의 작가 정숭호는 진짜 여행을 능가하거나 더욱 감동적으로 이탈하는 독서여행을 아예 업(業)으로 삼기로 작정한 것 같다.

가보지 않은 여행기는, 여행지에 있었던 사람, 그곳을 체험한 사람,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 그곳을 스쳐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기록들을 여행한 ‘행간의 기행문’이라 할 수 있다. 현장을 직접 간 것이 아니라, 문학 속에서, 혹은 예술 속에서 다양하게 접한 그곳을 마음 속으로 옮겨와 호젓이 거니는 인상적인 여행이다.

1차 텍스트가 현장이라면, 2차 텍스트는 현장을 기록해놓은 글이라 한다면, 그 글의 행간을 여정(旅程) 삼아 여행한 기록은 3차 텍스트다. 이런 기록까지도 다시 데려와 새로운 여정으로 삼는다면, 그건 4차, 5차의 돌연변이와 우연변이와 상상변이의 텍스트라고 할까. 여기에 몇 사람이 시차를 두고 바라보고 즐긴 풍경들이 통시적 겹눈으로 들어와 앉으면,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인문학적 풍경을 이룰 수 있다는 걸, 작가 정숭호는 보여준다.


3.베니스 주테카섬의 ‘타소’ 노래 소리를 드는 괴테

37세 괴테는 달밤에 베니스 주데카섬 해안에서 곤돌라를 탄다. 거기서 사공들이 양쪽에서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는다. 가까워지는 소리와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 차이를 귀로 느낀다.

먼 노랫소리엔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인 무엇이 있었다. 멀어지는 노랫소리가 자아내는 까닭 모를 깊은 애상. 이 슬픔은 도대체 무엇이 만드는 것일까. 거리일까, 소리가 줄어들면서 생기는 것일까, 작은 소리를 듣고자 귀기울이는 인간의 감수성 때문일까. 파도와 뒤섞인 소리의 습기 때문일까.

달빛에 젖으며 스러지는 노래의 몽환에 괴테가 빠져있을 때, 늙은 하인이 리도 출신 여자들의 노래가 좋다고 얘기하면서 이런 얘길 해준다.

"남정네들이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가면, 저녁 때 아낙들이 바닷가에 앉아 멀리 퍼지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저 멀리에 있는 남편들은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한답니다.“


4.이탈리아 시인 ‘타소’의 이야기를 희곡으로 쓴 괴테

파도소리에 반쯤 파묻힌 채 멀리서 들리는, 귀에 익은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노동의 피로를 푸는 남편. 저 노랫소리 하나로 먼 바다 위로 이어진 마음의 일렁이는 한 가닥 같은 것. 그녀들이 부른 노래는 타소의 노래였다.

괴테가 이곳에 온 것은 그가 존경했던 르네상스 이탈리아 시인 토르쿠아토 타소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가 7년째 만지작거리고 있는 희곡 '타소'를 완성하기 위해 타소가 숨쉰 그 공기를 호흡하고 싶어서였다.

그가 굳이 한 시인의 삶을 희곡으로 쓴 것은, 신분 규율이 엄격했던 당시 예속된 시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5.베니스의 리도해변, 토마스 만과 릴케의 바다

타소의 노래가 흘렀던 베니스의 리도는 이후 세대인 토마스 만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도 사랑받는 해변이었다.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늙은 작가 아센바하가 리도해변을 찾아와 같은 호텔에 묵고 있던 아름다운 한 소년을 먼 발치에서 오래 바라보다가 세상을 떠나는 이야기다.

나는 영화로 나온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찾아내 그 소설의 현장으로 들어갔다. 눈부신 리도해변과 아센바하, 그리고 멀리 보이는 소년을 눈이 아리도록 바라보았다. 임종을 앞둔 노인의 시야에 들어온, 갓 피어나는 소년의 이미지가 현기증처럼 사물거린다.

시간의 물결을 사랑하고 시간의 파도에 밀려나는 바다에서, 생이란, 혹은 존재란 어쩌면 하나의 여정으로만 남는 헛것 같은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리도의 노을이 멀리 바다에 선 소년과 그를 바라보다 고개가 꺾인 노인 사이에서 짙어져가는 모습은 잊을 수 없다.

작가 정숭호는 매년 9월 베니스영화제가 열리는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곤돌라 뱃사공을 노래를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리도여인들이 돌아오는 사랑을 향해 부르던 먼 목소리의 타소의 노래는 들을 수 없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6.남은 메모

괴테가 감탄한 대목이 마음에 내내 사물거린다.
곤돌라를 타고 출렁이는 뱃전의 양쪽에서 듣는 사공의 노랫소리.
양쪽에서 스테레오로 들리는 사공들의 노랫소리.
한쪽에선 잦아들고 한쪽에선 커져오는 그 소리.
파도에 적셔진 멋들어진 노랫소리가 더할 수 없이 사무치는 비창이라는 것.
가까운 소리보다 먼 소리가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
저녁답 낚싯배에 고기를 싣고 귀가하는 남편을 향해
이쪽 해변에서 넓고 깊은 목소리로
시인 타소의 노래를 불러주는 아내의 깊고 울림있는 목청.
그 먼 노랫소리를 들으며 귀를 열고 피로를 씻는 남편의 이야기.
베니스의 이 놀라운 청각적 풍경이 귓전에 맴돈다.

정숭호 작가.


7.인문학은 여행가방이다

여행가방에 인문학을 넣을 수 있을까. 아니, 인문학의 책갈피 속에 여행 중의 세밀한 감각과 기억을 끼울 수 있을까. '가보지 않은 여행기'(정숭호 작, HMG출판, 2018)는 저자 특유의 촘촘한 감수성과 '오감의 촉수'가 돋보인다.

책 속에 들어있는 여행의 기록들을 추적하여 실제 여행경험보다 더 밀도있고 감동적이며 리얼한 경험을 전해준다. 이 책은, 속도와 편리로 현기증을 낳아온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이 어디에서 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 하다.

역설적 여행의 즐거움. 발로 딛고 눈으로 보는 현장의 접면(接面)을, 해박한 독서이력을 바탕으로 가보지 않고도 가본 것보다 깊이 향유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일깨우는 독서경험이었다.

언론인 출신으로 현장과 기록의 접면(接面)을 음미하며, 사실과 상상력의 경계에서 빚어지는 지적 감성적 쾌감을 채굴해온 작가 정숭호. 이 땅에 이런 ‘선구적 혜안’의 인문학 천재가 있었다.

더뷰스 독서의맛 리뷰어 빈섬 이상국 isomis@naver.com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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