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ㅣ 남북조 전쟁사 - 5부 15화 최호(崔浩)의 죽음

 중국사 ㅣ 남북조 전쟁사 - 5부 15화 최호(崔浩)의 죽음


글: 방통

현호에서 송나라 군에 패한 북위는 일단 남하를 단념하고 군사를 돌렸다. 그 즈음 북위에서는 한 차례 큰 소동이 있었다. 이 일은 최호와 관련된 사건으로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최호는 주지하다시피 북위 제일의 책사이며 당시에도 손에 꼽히는 인재였다. 북위의 태무제 탁발도의 대외원정을 언제나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계책을 세웠으며 탁발도도 역시 최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였으니 탁발도와 최호는 그야말로 '수어지교'와도 같은 관계였다. 그런 총애를 받던 최호가 한순간에 탁발도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최호는 앞서 잠깐 언급했다시피 도무제 탁발규를 도와 개국에 큰 공을 세운 최굉의 아들이다. 가문이 2대에 걸쳐 북위의 황제 3대를 모시고 있으니 그야말로 북위의 최고 실세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최호의 권세는 더 무거워졌고 점차 북위 조정도 고윤(高允) 등 최호의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잠시 『위서』 「고윤전」의 기록을 보자.

"당초, 최호는 기주(冀州), 정주(定州), 상주(相州), 유주(幽州), 병주(并州) 5개 주의 선비 수십 명을 천거하여 각자 기가(起家)하여 군수로 했다. 공종(恭宗 : 탁발황)이 최호에게 말하기를 '먼저 징소한 사람은 역시 주와 군에서 선발하였고, 관직에 재임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부지런히 노력해도 답이 없습니다. 지금 먼저 군과 현에 보임하고 새로이 징소한 사람들을 대신 낭리(郎吏)로 삼으십시오. 또한 수령이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에는 일을 해본 사람을 임용하십시오,' 최호는 굳게 다투고 그들을 파견했다. 고윤이 이를 듣고 동궁박사(東宮博士) 관념(管恬)에게 말했다. '최공(崔公)은 면치 못하겠구나. 진실로 그릇된 것을 끝까지 하면서 윗사람을 이기려 하니 어찌 이를 감당하겠는가(初,崔浩薦冀, 定, 相, 幽, 并五州之士數十人,各起家郡守. 恭宗謂浩曰, 先召之人,亦州郡選也,在職已久,勤勞未答. 今可先補前召外任郡縣,以新召者代為郎吏. 又守令宰民,宜使更事者. 浩固爭而遣之. 允聞之,謂東宮博士管恬曰, 崔公其不免乎. 苟逞其非,而校勝於上,何以勝濟)."

공종(恭宗)은 태자 탁발황을 말한다. 탁발황은 최호에게 천거한 사람들 중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외직으로 보내려 했었다. 그러자 최호가 내심 언짢아 하며 탁발황에게 불만을 표했다가 어쩔 수 없이 탁발황의 의견을 따랐다는 것이다.

탁발황은 아무래도 최호의 사람들만이 조정에 남는 것을 견제하려고 했던 듯 싶다. 이후 고윤은 최호가 탁발황의 의견에 불만을 표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호는 끝까지 면치 못하겠구나. 윗사람을 끝까지 이기려 한다면 그걸 어찌 감당하겠는가?"

어쨌든 최호의 이런 행동은 다소 경솔했다고 볼 수 있다. 탁발도의 반응은 이 때 언급이 없지만 속으로 최호에게 실망을 하지는 않았을까.

어쨌든 이후에 탁발도는 최호를 감비서사(監秘書事)로 삼고, 중서시랑(中書侍郎) 고윤 등과 함께 『국기國記』, 즉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했다. 북위가 건국된 지 어언 반 세기가 지났고, 그동안 하북을 평정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 때 최호를 따라 국사 편찬에 참여한 사람 중에서 고윤 이외에도 저작영사(著作令史) 민담(閔湛), 치표(郄標)가 있었는데 민담, 치표는 최호를 추켜 세우면서 탁발도에게 상소를 올려 이전 선현들이 쓴 역사서는 정밀하지 못하고 오직 최호의 견해가 정확하며 조정에 소장되어 있는 책을 최호에게 넘겨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최호가 쓴 국사를 돌에 새겨 공적을 빛내자고 주장했다.

최호 또한 민담과 치표는 재능 있는 선비이니 적극적으로 이 둘을 활용해야 한다고 여길 정도였다. 최호는 민담과 치표의 지지를 받아 자신이 쓴 북위의 사적들을 돌에 새겨 세운 뒤에 백성들이 오가며 보게 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최호가 쓴 글이 북위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킨 것이다. 『북사』 「최호전」을 잠시 살펴보자. 

"최호가 국사(國事)를 서술하였는데 갖추어졌으나 떳떳하지 않은 것도 돌에 새겨 네거리에 나타내니 북인(北人)들이 모두 매우 심하게 화를 내며 서로 황제에게 최호를 음해했다(浩書國事, 備而不典,而石銘顯在衢路,北人咸悉忿毒,相與構浩於帝)."

이 기록은 『위서』 「최호전」에도 거의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치통감』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최호가 위나라의 선조들을 서술하였는데 사적이 모두 상세하고 진실하여 네거리에 늘여놓으니 오가며 보는 자들이 모두 그러할 것이라 했다. 북인들 중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서로 황제에게 최호를 참소하여 나라의 잘못을 폭로한다고 했다(浩書魏之先世,事皆詳實,列於衢路,往來見者鹹以為言. 北人無不忿恚,相與譖浩於帝,以為暴揚國惡)."

『위서』와 『북사』에는 "備而不典"라는 표현이 나오고, 『자치통감』에서는 "事皆詳實"로 바뀌었다. "갖추었으나 떳떳하지 않았다(備而不典)"는 말이나 "사적이 모두 상세하고 진실했다(事皆詳實)"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최호는 가감없이 북위의 있는 사실을 모두 모아 다 쓴 것 같다. 그러다보니 북위의 선황제들의 오점도 기록되었을 것이고 북위 사람들은 이를 불쾌히 여겼다는 것이다.

황제 입장에서는 최호의 글이 상당히 불쾌할 수 밖에 없었다. 선조들의 잘못을 백성들이 모두 알게 된다는 건 권력자로서는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북인(北人)들은 여기서 선비족을 뜻한다. 북인들이 매우 화가 나 최호를 비난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최호는 한족 명문가인 박릉 최씨 출신이다. 최호가 북위 선황들의 잘못도 숨기지 않고 모두 드러냈다는 사실에 대해 선비족들은 최호가 한족의 입장에서 선비족을 경멸한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고 일어나 최호를 맹비난하며 처벌을 요구했다.

탁발도 역시 최호의 집필에 화가 나 그를 체포하여 조사하도록 명을 내렸다. 최호가 체포되자 고윤이 입궐하여 최호를 사면해달라고 청했다. 탁발도가 고윤에게 물었다.

"국사는 모두 최호가 쓴 것인가?"

"「태조(탁발규)기」는 저작랑을 지냈던 등연(鄧淵)이 저술하였고 「선제(탁발사)기」와 「금기(今記 : 탁발도)」는 신이 최호와 함께 저술했습니다. 그러나 최호는 관장한 일이 많고 대강을 결정하였을 뿐 저술은 신이 더 많이 했습니다."

"그렇다면 최호보다도 죄가 더 심하구나. 어찌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곁에 있던 태자 탁발황이 고윤을 살리려 탁발도에게 말했다.

"고윤은 소신(小臣)입니다. 정신이 어지러울 뿐더러 신이 종전에 물어보니 모두 최호의 일이라 했습니다."

탁발도가 다시 고윤에게 물었다.

"태자의 말과 같은가?"

"신의 죄는 멸족에 해당합니다. 헛되이 망령될 수 없습니다. 태자전하께서 신이 시강(侍講)한 것이 오래되어서 신을 살리려 한 것일 뿐입니다."

탁발도는 그러자 이렇게 말했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말을 바꾸지 않으니 강직하다 할 만 하다. 또한 군주를 속이지 않으니 굳세구나."

그러고서는 고윤은 특별히 용서해주었다. 그러나 최호는 예외였다. 탁발도는 최호를 불러 마구 힐난했다. 그리고 최호를 추궁한 끝에 최호는 결국 자신을 지지한 사람들의 뇌물을 받아 그리 작성했다고 자복을 하고 말았다. 이는 그다지 큰 신빙성이 없는 대목이라 생각된다. 아마 고문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탁발도가 원하는 답을 한 것일 수도 있다. 결국 최호를 비롯한 최호의 가문 사람들을 죽이고 한족 중 명문가인 범양 노씨(盧氏), 태원 곽씨(郭氏), 하동 유씨(柳氏)도 연루시켜 멸문시켰다.

이렇게 당시 명성을 떨치던 책사 최호는 국사 편찬 문제로 너무나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실 이는 탁발도의 무리수이기도 했다. 『위서』를 지은 위수(魏收)는 「최호전」에서 최호를 이렇게 평했다.

"최호의 재예(才藝)는 통박(通博)하여 하늘과 사람을 헤아려 보고, 정사(政事)를 생각하는 계책은 당시에 버금가는 이가 없어서 그 스스로 장자방에 비교했다. 태종(太宗 : 탁발사)을 수행하여 정벌할 때나, 세조(世祖 : 탁발도)가 경영을 하는 날에 (최호의) 말을 듣고 계책에 따랐으니 구하(區夏)를 넓혀 판안히 하고 이미 융성함을 만났다. 부지런하면서도 힘썼도다. 계책은 비록 세상을 덮고 위세는 군주를 떨게 하지는 않았지만 끝에 가서는 해후(邂逅)하여 결국 스스로 보전하지 못했다. 어찌 새가 죽자 활을 숨기고 백성들은 위를 싫어했단 말인가. 장차 그릇이 차면 대개 그러한데 음해의 화가 끼쳤다. 어찌 이 사람이 이런 화를 입었는가. 슬프구나(崔浩才藝通博,究覽天人,政事籌策,時莫之二,此其所以自比於子房也. 屬太宗為政之秋,值世祖經營之日,言聽計從,寧廓區夏. 遇既隆也,勤亦茂哉. 謀雖蓋世, 威未震主,末途邂逅,遂不自全. 豈鳥盡弓藏,民惡其上. 將器盈必概,陰害貽禍. 何斯人而遭斯酷,悲夫)."

중국사 ㅣ 남북조 전쟁사 - 5부 15화 최호(崔浩)의 죽음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댓글 쓰기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