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방통
이정기로부터 시작된 치청번진은 이납에 이르러 제나라로 성장했고 이후 이사고와 이사도를 거치면서 55년 동안 산동 지역에서군림했다. 마지막 통치자였던 이사도는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유오의 배신으로 인하여 허무하게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이사도가 죽었을 때 그가 거느리던 군사들과 백성들 역시 처참하게 살해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신당서』 「오행지五行志」의 기록을 보자.
"원화(元和)14년 2월, 운주종사원(鄆州從事院) 문 앞에 피가 있었는데 사방이 1척여 정도 되었고 색깔은 더욱 선명하게 붉어졌는데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라 여겼다(元和十四年二月, 鄆州從事院門前地有血, 方尺餘,色甚鮮赤, 不知所從來, 人以為自空而墮也)."
이사도가 멸망하던 해는 원화14년(819) 2월이고, 이사도는 당시 운주에 주둔하면서 여러 절도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 문 앞에 피가 1척 고여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치열한 싸움이 있어서 희생이 막대했음을 묘사한 것이다. 유오가 운주로 몰래 들어와 이사도의 목을 베자 그 군사들이 저항했고 결국 이러한 최후로 이어졌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유오는 이사도의 머리를 벤 공적으로 당 조정으로부터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 겸어사대부(兼御使大夫), 의성군절도사(義成軍節度使)에 제수되었고 팽성군왕(彭城郡王)에 봉해졌다. 거기에다 봉읍 500호를 받고, 2만 금에 전택(田宅)까지 받았다. 그야말로 후한 상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자신의 주군을 배신한 유오 역시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당 헌종은 이사도를 멸망시키고 1년 뒤인 82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태자 이항(李恒)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당 목종(唐穆宗)이다. 821년 7월, 노룡 번진에서 주극융(朱克融)이 조정에 다시 반기를 들었다. 주극융은 과거 유주, 노룡 번진을 통치하면서, 한 때 이납과 연합하기도 했던 주도의 손자였다.
당 목종은 유오에게 주극융을 토벌하라고 명을 내렸다. 유오가 군사를 이끌고 북진을 했으나, 당 헌종에게 별다른 저항없이 투항했던 왕승종의 뒤를 이어 왕정주(王廷湊)가 임시로 성덕절도사가 되고서 위박절도사 전홍정을 죽인 뒤에 조정에 요구하여 정식으로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여러 번진에서 이러한 어수선한 상황이 연이어 일어나자 유오는 더 북진하지 않고 형주(邢州)에 주둔하면서 관망만 했다. 중앙에서 파견했던 감군(監軍) 유승해(劉承偕)가 유오를 비판하면서 독자적으로 움직이려 하자 유오 역시 유승해를 제거하려 마음 먹었다. 의성군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면서 일찍이 이사도를 섬기다 지금은 유오의 막료가 된 가직언(賈直言)이 비판했다. 『신당서』「유오전」에 기록된 가직언의 말을 살펴보자.
"이사공(李司空)은 죽었어도 알고 있어서 공(公)에게 이러한 일이 있게 한 것이니, 군중에서 장차 다시 공과 같은 이가 있을 것입니다(李司空死有知, 使公所為至此, 軍中將復有如公者矣)."
유오는 이사도가 다시 거론되자 두려워 하면서 유승해를 억류하려 했다. 당 목종은 자신이 파견한 감군과 극심하게 대립하는 유오를 보면서 그를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유승해를 다시 불러들여 유배 보내는 조치를 해서 유오를 회유하려 했다. 예전의 주도, 왕무준처럼 이번에는 그 후손들인 주극융, 왕정주가 다시 일어나려는 마당에 유오까지 등을 돌리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당서』 「유오전」에는 "유오는 이로부터 마음대로 하면서 방자하고 상서(上書)에는 공손하지 못한 말이 많았다(然悟自是頗專肆, 上書言多不恭)."라고 했다. 이렇게 오만해졌던 유오는 급서하고 만다. 『신당서』 「유오전」을 계속해서 살펴보자.
"보력(寶歷) 초(825), 무당이 망령되어 말하기를, 이사도가 유리파(鎦璃陂)에 군사를 주둔하고 있다고 하였다. 유오는 두려워하며 명을 내려서 기도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1천명분의 음식을 준비한 뒤 직접 가서 애도를 표하였다. 옷을 갈아 입으려 하는데 피를 몇 말이나 토하고 졸하였다. 태위로 추증되었다(寶歷初, 巫者妄言師道以兵屯鎦璃陂, 悟惶恐, 命禱祭, 具千人膳, 自往求哀. 將易衣, 嘔血數鬥, 卒. 贈太尉)."
유오는 속으로 계속 이사도를 시해한 일을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사도가 다시 나타났다는 유언비어가 돌자 극한 두려움에 휩싸여 제사를 지내려 한 것도 바로 그런 심리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곧바로 피를 토하고 죽었으니 사람들은 이사도의 혼령이 유오를 죽인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사도가 다스리던 제나라 지역 12개 주는 3명의 절도사가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운주(鄆州), 복주(濮州), 조주(曺州) 등은 화주자사(華州刺史) 마총(馬總)이 다스리고, 설평(薛平)은 평로, 청주자사가 되어 치주(淄州), 청주(靑州), 제주(齊州), 등주(登州), 내주(萊州) 등을 다스리게 되었으며, 왕수(王遂)는 기주(沂州), 해주(海州), 연주(兗州), 밀주(密州)를 다스리게 되었다.
특히 과거 고구려를 침공했던 설인귀의 후손 설평이 고구려의 후손 이정기가 다스리던 핵심 지역인 치주, 청주를 다스리면서 그 직책인 압신라발해양번등사까지 가져갔으니 참 대를 이어서 이렇게까지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당나라 중앙 일대라 할 수 있는 산동 지역에 55년간이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맞섰던 이정기 일가. 그들은 고구려의 후손으로써 결코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에 각인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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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만에 겨우겨우 1부를 끝내게 되었다. 평일에는 시간이 별로 나지 않아 포스팅도 많이 지체되고 공부도 소홀히 하여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부족한 글이 되었다.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항상 봐주시면서 좋은 말씀을 주신 소울님, 맑은소리님, OneSilver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부는 잠깐 쉬었다가 좀 더 다듬어서 쓸 예정입니다. 올한해도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