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방통
故用兵之法, 十則圍之.
그러므로 용병의 법칙에서는 10배이면 포위한다.
曹公曰, 以十敵一則圍之, 是將智勇等而兵利鈍均也. 若主弱客强, 不用十也. 操所以倍兵圍下邳生擒呂布也
조공(曹公)이 말하기를 , 10배이면 포위한다는 것은 (적과 아군의) 장수의 지략과 용맹이 대등하고 병사와 예기와 무기가 대등한 경우이다. 만약 적이 약하고 아군이 강하면 10배를 쓸 필요도 없다. 나 조조는 (曹操)2배의 병력으로서 하비성을 포위하고 여포(呂布)를 생포했다.
五則攻之,
5배이면 공격하고
曹公曰, 以五敵一, 則三術爲正, 二術爲奇.
조공이 말하기를, 5배로 하나를 대적할 때는 3은 정공법으로, 2는 기병(奇兵)으로 한다.
倍則分之.
2배이면 (적을) 분산시킨다.
曹公曰, 以二敵一, 則一術爲正, 一術爲奇.
조공이 말하기를 2배로 하나를 대적할 때는 하나는 정공법으로 하나는 기병(奇兵)으로 한다.
조조는 『손자병법』에 주석을 달면서 자신의 경험과 응용사례를 넣었다. 「모공편」에서 보이듯 "적이 10배이면 포위한다"는 손자의 이론에 조조는 "2배라도 가능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조조가 병법 응용에 남달랐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조조가 세력이 아직 약할 때 조조에게는 두 가지 근심이 있었다. 하나는 원소(袁紹)이고 하나는 여포였다.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버거웠다. 조조의 참모 곽가(郭嘉)는 여포를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삼국지』 「위지 곽가전」에 인용된 「부자傅子」를 보자.
"곽가가 또 말하기를 '원소는 바야흐로 북쪽의 공손찬(公孫瓚)을 공격하려 하니 원정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동쪽으로 여포를 취해야 합니다. 먼저 여포를 취하지 않고 만약 원소와 대적하면 여포가 (원소를) 지원할 것이니 이는 심각한 해가 될 것입니다.' 태조가 말하기를 '그리하겠소.'했다(嘉又曰, 紹方北擊公孫瓚,可因其遠征,東取呂布. 不先取布,若紹為寇,布為之援,此深害也. 太祖曰, 然.)."
순욱(荀彧) 역시 "여포를 먼저 취하지 않고서는 하북 또한 도모하기 쉽지 않습니다(不先取呂布,河北亦未易圖也)."라고 말했다. 그러나 조조에게는 아직 우려가 남아 있었다.
"내가 의심스러워 하는 바는 원소가 관중(關中)으로 들어가 강족, 호족과 작란하고 남쪽으로 촉한을 꾀어낸다면 우리는 외로이 연주(兗州), 예주(豫州)로써 천하의 6분의 5에 대항해야 하오. 이렇게 되면 어찌해야 하오(吾所惑者,又恐紹侵擾關中,亂羌、胡,南誘蜀漢,是我獨以兗、豫抗天下六分之五也. 為將奈何.)?"
그러자 순욱이 말했다.
"관중의 장수는 10명인데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며 오직 한수(韓遂)와 마초(馬超)만이 가장 강합니다. 그들은 산동에서 바야흐로 다툼을 보고선 반드시 각기 군사를 인솔하여 자신을 보호하려 할 것이니 지금 만약 은덕으로 안무하고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으면 비록 오랫동안 안정을 기대할 수는 없어도 공이 산동을 안정시킬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는데 충분할 것입니다. 종요(鍾繇)가 가히 서쪽의 일을 맡을 수 있으니 공께서는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關中將帥以十數,莫能相一,唯韓遂、馬超最彊. 彼見山東方爭,必各擁眾自保. 今若撫以恩德,遣使連和,相持雖不能久安,比公安定山東,足以不動. 鍾繇可屬以西事. 則公無憂矣.)."
조조는 순욱의 계책을 받아들여 기본방침을 정했다. 원교근공(遠交近攻).
우선 조조는 종요를 장안으로 보내 서쪽의 일을 위임했다. 종요는 관중의 장수들을 다독거리면서 서찰을 보내 일의 득실을 논하고 설득시켰다. 한수 등은 아들을 허도로 보내 우선 조조와 적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다음으로 원소를 최고 관직으로 예우한다고 상주하여 원소가 공손찬에만 신경쓰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여포를 치는 동안 후방의 근심은 해소된 셈이었다.
다음으로 여포 진영을 이간질시켰다. 진규(陳珪), 진등(陳登) 부자는 이미 조조와 내통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포의 동태를 조조에게 은밀히 알려주고 있었다. 조조가 여포를 좌장군에 임명한다고 하자 여포는 진등을 보내 감사를 표했다. 그 때 진등은 조조와 만났다. 조조는 진등을 광릉태수에 임명하면서 "동쪽의 일은 모두 그대에게 맡기겠소(東方之事,便以相付)."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여포를 칠 세력을 모았다. 조조는 유비를 진동장군, 예주목으로 천거하고 여포를 공격하는데 지원하도록 했다.
건안3년(198). 9월. 조조는 여포 토벌에 나섰다. 당시 여러 장수들이 유표(劉表), 장수(張繡)가 배후를 칠까 두려워했다. 그러자 순유(荀攸)가 표를 올려 말했다.
"장수가 격파된 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그 기세로는 감히 움직이지 못합니다. 여포는 효맹하고 또 원술을 믿고 있으니 만약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사이를 횡행하면 호걸들이 반드시 호응할 것입니다. 지금 반란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사람들 마음이 아직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을 이용하면 가히 여포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繡新破,勢不敢動. 布驍猛,又恃袁術,若縱橫淮、泗間,豪傑必應之. 今乘其初叛,眾心未一,往可破也.)"
조조는 회양에서 출발하여 여포를 공격했고 팽성에 이르렀다. 여포의 책사 진궁이 "우리는 편안히 하면서 적을 피로하게 하자"는 이일대로(以逸待勞)의 계책을 제시했지만 여포는 듣지 않았다.
10월. 조조는 팽성을 격파했고 광릉태수 진등은 조조에게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하비로 쳐들어갔다. 이 때 여포가 군사를 내 여러 번 조조와 싸웠지만 모두 패했다. 조조는 여포에게 투항하라고 편지를 보냈다. 진궁이 반대하면서 말했다.
"조조는 멀리서 왔으므로 형세상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장군이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성 밖에 주둔하고 제가 남은 병력으로 문을 닫은 뒤 성 안을 지키면 됩니다. 만약 적이 장군을 공격하면 제가 적의 배후를 치고 적이 성을 공격하면 장군이 밖에서 구원해주면 됩니다. 1달이 채 안 되어 적군의 식량이 떨어질 것이니 그 때 공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曹公遠來,埶不能久. 將軍若以步騎出屯於外,宮將餘眾閉守於內. 若向將軍,宮引兵而攻其背, 若但攻城,則將軍救於外. 不過旬月,軍食畢盡,擊之可破也.)."
그러나 여포의 부인 엄씨가 "다른 사람에게 성을 맡길 수 없다"며 반대하자 여포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조조는 하비성을 더욱 포위했다.
12월. 조조는 기수(沂水)와 사수의 물을 끌어들여 하비성을 물에 잠기게 했다. 여포의 부장 후성(侯成), 송헌(宋憲), 위속(魏續) 등은 조조에게 투항했다. 여포는 백문루에 올라가 있다가 결국 조조에게 사로잡혔다.
이렇게 조조는 단 3개월만에 여포를 멸망시켰다. 잠재 위협세력을 제거함에 있어 탁월한 속전속결을 보여준 것이다. 조조는 진등을 앞세워 여포를 하비성 안에 가두는데 성공했고 성 둘레에 참호를 판 뒤 기수, 사수의 물을 끌어들여 수공을 펼쳤다. 구원병도 없고 식량도 떨어진 여포는 그렇게 망한 것이다.
『손자병법』 조조의 주석에서 보이듯 조조가 여포를 토벌할 때 동원한 병력은 여포의 2배라고 본다. 손자도 10배여야 적을 포위한다고 말했는데 조조는 나아가 이를 응용하여 최소한의 병력으로 최대 효과를 낸 것이다. 그가 실전에 얼마나 강한가를 방증하는 셈이다.
조조는 그러면 병력을 어느 정도 동원했을까. 『후한서』「여포전」에서는 당시 여포로부터 혼사를 거절당한 원술이 여포를 칠 때 여포에게는 남아 있던 병력이 3천이고 말 4백필이라고 했다(布時兵有三千,馬四百匹). 진등이 조조로부터 광릉태수에 임명되었던 시기이므로 그 때가 건안2년(197). 여포가 죽기 1년 전이다. 그러므로 아마 여포가 병력을 다시 회복했다고 쳐도 얼마 충당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넉넉잡아 여포가 병력을 최대 5천을 회복했다고 한다면 조조는 그 2배쯤 되는 대략 1만 이하에서 1만까지 동원하지는 않았을까라고 나름 추측해본다.
조조는 "병력 차이가 2배가 나면 군사를 나눠 하나는 정공법, 하나는 기병(奇兵)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실제로 조조는 하비성을 공격하는 정공법을 사용하면서도 여포의 부장들을 투항하게 하는 기병을 사용하였다.
조조가 『손자병법』에서 이렇게 여포 토벌의 사례를 넣은 것은 그만큼 병법의 응용에 자신이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