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공간 ㅣ 강용석 |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강용석(1958~)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OU)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백제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개인전으로 《매향리 풍경》, 《동두천과 매향리》, 《한국전쟁 기념비》, 《부산 참견록》 등이 있고 2010년 제9회 동강사진상을 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뮤지엄한미, 동강사진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전쟁의 기억
오늘도 지구의 한 모퉁이에선 전쟁이 진행 중이다. 이 지구 위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없었던 적이 단 하루라도 있었을까? 설사 전쟁이 끝나더라도 전쟁의 기억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전쟁은 참혹하면서 또한 끈질기다. 6.25 한국전쟁은 1950년에 발발하여 1953년에 휴전협정을 맺음으로써 일단락을 지었다지만 과연 우리의 전쟁은 끝이 났는가? 사진가 강용석(1958~)은 지난 40년간 끈기 있게 이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이데올로기에 경도되거나 강하게 저항하는 성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20대부터 60대 중반에 이르는 지금까지 일관되게 ‘전쟁 그 후’를 기록해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백제예술대학 교수로서 정년을 1년 남긴 강용석 작가의 작업실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익산시 춘포면에 자리하고 있다. ‘봄 나루터’라는 의미인 ‘춘포(春浦)’에서 알 수 있듯이 그곳은 너른 김제평야를 적시는 만경강 인근 마을이다. 시야가 확트인 가을 들판을 달려 도착한 작업실은 그의 흑백사진처럼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고 정갈했다. 220평의 반듯한 대지에 지은 40평 건물에는 암실과 수장고, 컴퓨터가 있는 서재와 거실 등, 처음부터 작업을 위한 공간으로 설계했기 때문에 작업실로서 아주 쾌적하고 편리하다.
“모든 일이 꼭 나의 구상에 따라 이루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지방대학이 어려워지면서 내가 몸담은 백제예술대에서 사진과가 없어졌거든요. 학과를 정리하면서 암실이 없어지고 학교 측에서 사진 관련 장비를 양도해주니까 공간이 필요해진 거죠. 정년퇴임 후로 미뤘던 작업실을 서둘러 장만하게 되었는데 마침 여기와 인연이 닿았어요.”
그는 2018년에 준비하여 2019년 6월에 이곳 작업실로 옮겨왔다고 말한다. 그가 작업실을 지으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암실이다. 심지어 암실을 집의 중앙에 배치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공간이 너무 쪼개진다는 전문가의 만류로 뜻을 관철하진 못했다고 한다.
오늘도 지구의 한 모퉁이에선 전쟁이 진행 중이다. 이 지구 위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없었던 적이 단 하루라도 있었을까? 설사 전쟁이 끝나더라도 전쟁의 기억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전쟁은 참혹하면서 또한 끈질기다. 6.25 한국전쟁은 1950년에 발발하여 1953년에 휴전협정을 맺음으로써 일단락을 지었다지만 과연 우리의 전쟁은 끝이 났는가? 사진가 강용석(1958~)은 지난 40년간 끈기 있게 이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이데올로기에 경도되거나 강하게 저항하는 성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20대부터 60대 중반에 이르는 지금까지 일관되게 ‘전쟁 그 후’를 기록해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백제예술대학 교수로서 정년을 1년 남긴 강용석 작가의 작업실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익산시 춘포면에 자리하고 있다. ‘봄 나루터’라는 의미인 ‘춘포(春浦)’에서 알 수 있듯이 그곳은 너른 김제평야를 적시는 만경강 인근 마을이다. 시야가 확트인 가을 들판을 달려 도착한 작업실은 그의 흑백사진처럼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고 정갈했다. 220평의 반듯한 대지에 지은 40평 건물에는 암실과 수장고, 컴퓨터가 있는 서재와 거실 등, 처음부터 작업을 위한 공간으로 설계했기 때문에 작업실로서 아주 쾌적하고 편리하다.
“모든 일이 꼭 나의 구상에 따라 이루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지방대학이 어려워지면서 내가 몸담은 백제예술대에서 사진과가 없어졌거든요. 학과를 정리하면서 암실이 없어지고 학교 측에서 사진 관련 장비를 양도해주니까 공간이 필요해진 거죠. 정년퇴임 후로 미뤘던 작업실을 서둘러 장만하게 되었는데 마침 여기와 인연이 닿았어요.”
그는 2018년에 준비하여 2019년 6월에 이곳 작업실로 옮겨왔다고 말한다. 그가 작업실을 지으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암실이다. 심지어 암실을 집의 중앙에 배치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공간이 너무 쪼개진다는 전문가의 만류로 뜻을 관철하진 못했다고 한다.
“제 사진은 모두 젤라틴 실버프린트이기 때문에 제 작업실에서는 암실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암실이 구석에 박혀 있으면 선뜻 들어가고 싶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래서 가운데에 두고 어디서든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하려고 했던 거죠.”
물론 지금도 그의 암실은 작업실 안에서 안방처럼 가장 편안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직접 인화 작업을 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사진반 활동을 하다가 1977년에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사진으로 삶의 방향을 정한 이후 줄곧 흑백사진을 고수하고, 사진의 주제도 대학 3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전쟁이 파생시킨 흔적과 현상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를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초지일관 흔들림 없는 사진가이다. 그런데 딱 한 시리즈, 컬러사진으로 이루어진 작업이 있는데 그 사연이 아주 흥미롭다. 동두천 3개의 시리즈 가운데 그가 거리의 사진가로서 진행한 세 번째 시리즈가 바로 컬러사진이다.
물론 지금도 그의 암실은 작업실 안에서 안방처럼 가장 편안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직접 인화 작업을 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사진반 활동을 하다가 1977년에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사진으로 삶의 방향을 정한 이후 줄곧 흑백사진을 고수하고, 사진의 주제도 대학 3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전쟁이 파생시킨 흔적과 현상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를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초지일관 흔들림 없는 사진가이다. 그런데 딱 한 시리즈, 컬러사진으로 이루어진 작업이 있는데 그 사연이 아주 흥미롭다. 동두천 3개의 시리즈 가운데 그가 거리의 사진가로서 진행한 세 번째 시리즈가 바로 컬러사진이다.
동두천 거리의 사진가
2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가 전역 후 3학년으로 복학하면서 그는 본격적인 사진이론 공부와 함께 동두천 시리즈를 시작했다. 당시에 용산 미군 부대와 가까운 이태원과 평택의 기지촌에서 촬영했고 주말에는 동두천으로 가서 사진을 찍었다고 말한다.
“동두천에 주말마다 열심히 다니니 그곳에서 가게를 하는 형들과 친해지게 됐어요. 그곳이 좀 험한 동네인데 든든한 뒷배가 생긴 거죠. 그래서 졸업을 앞두고 이제 더 본격적으로 동두천을 찍어보자고 생각했어요.”
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는 동두천에 방을 얻어 아예 거리의 사진사로 나섰다. 마침 그 무렵에 그곳 클럽에서 일하던 사진사가 그만두면서 그 자리를 물려받아 1달러를 받고 기념사진 한 장을 찍어주는 미군클럽의 사진사가 된 것이다.
“그날 찍어서 다음날 사진이 나와야 그들에게 전달하니까 흑백필름으로는 찍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컬러필름으로 찍어서 퀵 현상소에 맡겨 인화할 수밖에 없었어요.”
2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가 전역 후 3학년으로 복학하면서 그는 본격적인 사진이론 공부와 함께 동두천 시리즈를 시작했다. 당시에 용산 미군 부대와 가까운 이태원과 평택의 기지촌에서 촬영했고 주말에는 동두천으로 가서 사진을 찍었다고 말한다.
“동두천에 주말마다 열심히 다니니 그곳에서 가게를 하는 형들과 친해지게 됐어요. 그곳이 좀 험한 동네인데 든든한 뒷배가 생긴 거죠. 그래서 졸업을 앞두고 이제 더 본격적으로 동두천을 찍어보자고 생각했어요.”
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는 동두천에 방을 얻어 아예 거리의 사진사로 나섰다. 마침 그 무렵에 그곳 클럽에서 일하던 사진사가 그만두면서 그 자리를 물려받아 1달러를 받고 기념사진 한 장을 찍어주는 미군클럽의 사진사가 된 것이다.
“그날 찍어서 다음날 사진이 나와야 그들에게 전달하니까 흑백필름으로는 찍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컬러필름으로 찍어서 퀵 현상소에 맡겨 인화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컬러사진을 선택한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동두천 동네 사진관 진열장에 있는 사진들이 그곳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어울린다고 생각, 알아보니 값이 싼 사쿠라 필름으로 찍어서 그 동네의 유일한 QS에서 인화하면 그런 색감이 나온다고 했다. 동두천에서만 맡을 수 있는 묘한 냄새 - 거리를 가로지르는 시궁창에서 나는 냄새와 튀김과 버터 냄새, 미군이 뿌리는 향수 냄새와 여인의 싸구려 분 냄새가 뒤섞인 미묘한 분위기가 조악한 색감과 잘 맞아떨어졌다.
그가 클럽에서 미군과 한국 여인의 기념사진을 찍은 동두천 컬러사진 시리즈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오히려 결과는 좋았다. 거칠고 조잡한 색감이 미군들이 드나드는 클럽의 싸구려 분위기와 그곳에서 만나는 미군과 한국 여인의 어색하면서도 유치한 포즈와 잘 맞아 더 효과적이었다. 그렇게 1년을 동두천 거리의 사진사로 지내면서 만든 포트폴리오는 그가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OU)로 유학갈 때 입학허가를 받는 데에 일조했다. 그리고 더 훗날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 매향리 시리즈와 함께 소장되는 등 그의 유일한 컬러사진 작업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그가 클럽에서 미군과 한국 여인의 기념사진을 찍은 동두천 컬러사진 시리즈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오히려 결과는 좋았다. 거칠고 조잡한 색감이 미군들이 드나드는 클럽의 싸구려 분위기와 그곳에서 만나는 미군과 한국 여인의 어색하면서도 유치한 포즈와 잘 맞아 더 효과적이었다. 그렇게 1년을 동두천 거리의 사진사로 지내면서 만든 포트폴리오는 그가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OU)로 유학갈 때 입학허가를 받는 데에 일조했다. 그리고 더 훗날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 매향리 시리즈와 함께 소장되는 등 그의 유일한 컬러사진 작업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느린 걸음이지만 분명하게
80년대에 동두천, 90년대에 매향리, 2000년대에 민통선 선전촌과 한국전쟁 기념비 시리즈, 2010년대에 <부산 참견록>과 한국전쟁 기념비 시리즈 2탄인 <기억 전쟁> 시리즈 등 강용석 작가는 끊임없이 목표가 분명한 사진 작업을 계속해왔다. 40년간 사진의 소재는 달라도 그의 지향점은 같았다.
“매향리 작업은 1995년과 1999년 두 차례에 걸쳐서 진행했는데, 특히 99년 작업부터는 중형카메라를 써서 정방형 포맷으로 옮겨갔어요.”
그는 매향리 작업을 봄볕에 건조한, 구름이 80%쯤 낀 날에 진행했다고 말한다. 가장 건조한 중립적인 위치에서 매향리를 바라보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가 읽힌다. 매향리는 한국전쟁 이후 미 공군의 사격연습장으로 쓰인 서해안의 알려지지 않은 어촌이었다. 그러나 90년대에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면서 매향리가 이슈로 떠올랐고 그의 작업이 시작되었다. 평일에는 사격 연습으로 출입이 통제되다가 주말에만 어민들이 굴 캐러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는 어민들을 따라서 해안에 접근했다.
80년대에 동두천, 90년대에 매향리, 2000년대에 민통선 선전촌과 한국전쟁 기념비 시리즈, 2010년대에 <부산 참견록>과 한국전쟁 기념비 시리즈 2탄인 <기억 전쟁> 시리즈 등 강용석 작가는 끊임없이 목표가 분명한 사진 작업을 계속해왔다. 40년간 사진의 소재는 달라도 그의 지향점은 같았다.
“매향리 작업은 1995년과 1999년 두 차례에 걸쳐서 진행했는데, 특히 99년 작업부터는 중형카메라를 써서 정방형 포맷으로 옮겨갔어요.”
그는 매향리 작업을 봄볕에 건조한, 구름이 80%쯤 낀 날에 진행했다고 말한다. 가장 건조한 중립적인 위치에서 매향리를 바라보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가 읽힌다. 매향리는 한국전쟁 이후 미 공군의 사격연습장으로 쓰인 서해안의 알려지지 않은 어촌이었다. 그러나 90년대에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면서 매향리가 이슈로 떠올랐고 그의 작업이 시작되었다. 평일에는 사격 연습으로 출입이 통제되다가 주말에만 어민들이 굴 캐러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는 어민들을 따라서 해안에 접근했다.
평화로운 작은 어촌이 전쟁도 아닌,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한 전쟁 대비 훈련으로 피폐화되는 현장이지만 그의 매향리 풍경은 얼핏 보면 해변 모래밭에 흩어져 있는 대형 불발탄이나 목표지점 표시용으로 쓰인 구조물들이 평화로운 풍경의 요소로 보일 만큼 고요하다. 분노의 절규나 고발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 고요함은 그가 공격적인 물체를 화면에 구성하는 프레임이나 중립적인 화면의 톤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오히려 심연의 고요함은 현실 세상과 절연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그림자가 없어 평평하고 회색인 화면은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진공의 세상처럼 느껴지게 한다. 힘없는 개인으로서는 소리를 지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세월이었음을 표현한 것일까.
“물론 내 사진 때문은 아니겠지만 매향리 사격장은 2003년부터 논의가 시작되어 2005년에 완전히 폐쇄됐어요. 휴전된 지 52년만입니다. 그럴 때 사진의 힘을 느낍니다. 사진으로 계속 발언해야 한다는 확신도 갖게 되고요.”
반세기가 지나고 나서 비로소 매향리 주민의 한국전쟁은 막을 내린 셈이다.
“물론 내 사진 때문은 아니겠지만 매향리 사격장은 2003년부터 논의가 시작되어 2005년에 완전히 폐쇄됐어요. 휴전된 지 52년만입니다. 그럴 때 사진의 힘을 느낍니다. 사진으로 계속 발언해야 한다는 확신도 갖게 되고요.”
반세기가 지나고 나서 비로소 매향리 주민의 한국전쟁은 막을 내린 셈이다.
기억 전쟁
매향리 작업이 끝나고 그의 발길은 민통선으로 향했다. 민통선 안에 선전촌이라는 마을을 촬영하기 시작한 것인데 처음엔 그곳 주민들의 인물사진이나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일로 접근했다. 자주 그곳에 드나들면서 이들의 삶이야말로 북한의 시야에 포착되는 ‘보여지는’ 삶이란 것을 깨달았다. 60년대에 집과 땅을 준다는 조건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주했는데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서로 동질감을 형성하지 못하면서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꾸 떠나고 특히 젊은 세대가 정착하지 않음으로써 지금은 소멸해가는 마을이 되었다. 노인들만 남은 이 마을에서 의도했던 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지진 못했지만 경기도와 강원도 북부에 유난히 동상이 많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한국전쟁 기념비라는 작업의 단초가 되었다.
전쟁은 기념해야 하는 것인가, 기억해야 하는 것인가? 작가가 기념비 앞에서 갖는 의문이다. 전국 곳곳에 의외로 많은 전쟁 기념비를 찾아다니며 작업한 작가는 그것들이 대부분 무관심 속에 놓여있거나 방치된 것을 보면서 기념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2006년부터 시작한 한국전쟁 기념비는 2016년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전시한 《부산 참견록》에서도 중심을 이룬다. 그는 부산이란 도시를 보여줌에 있어서 한국전쟁이란 화두를 꺼낸다. 부산이 당시 한반도 최후의 보루였고 전쟁 피난민들의 집결지였던 역사를 상기하면서 실은 적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최대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기억하게 하는 동상이 많음에 주목했다.
매향리 작업이 끝나고 그의 발길은 민통선으로 향했다. 민통선 안에 선전촌이라는 마을을 촬영하기 시작한 것인데 처음엔 그곳 주민들의 인물사진이나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일로 접근했다. 자주 그곳에 드나들면서 이들의 삶이야말로 북한의 시야에 포착되는 ‘보여지는’ 삶이란 것을 깨달았다. 60년대에 집과 땅을 준다는 조건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주했는데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서로 동질감을 형성하지 못하면서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꾸 떠나고 특히 젊은 세대가 정착하지 않음으로써 지금은 소멸해가는 마을이 되었다. 노인들만 남은 이 마을에서 의도했던 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지진 못했지만 경기도와 강원도 북부에 유난히 동상이 많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한국전쟁 기념비라는 작업의 단초가 되었다.
전쟁은 기념해야 하는 것인가, 기억해야 하는 것인가? 작가가 기념비 앞에서 갖는 의문이다. 전국 곳곳에 의외로 많은 전쟁 기념비를 찾아다니며 작업한 작가는 그것들이 대부분 무관심 속에 놓여있거나 방치된 것을 보면서 기념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2006년부터 시작한 한국전쟁 기념비는 2016년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전시한 《부산 참견록》에서도 중심을 이룬다. 그는 부산이란 도시를 보여줌에 있어서 한국전쟁이란 화두를 꺼낸다. 부산이 당시 한반도 최후의 보루였고 전쟁 피난민들의 집결지였던 역사를 상기하면서 실은 적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최대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기억하게 하는 동상이 많음에 주목했다.
아직 미발표작인 최근 작업은 한국전쟁 기념비 제2탄이라고 할 수 있는 <기억 전쟁>이다. 작가는 뭔가 기념한다는 기념비가 오히려 반기념으로 가는 역설을 꼬집는다. 기념비라는 것은 승전비이고 대부분 호전적인데 진정 기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세워지는 것일까, 아니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들어있는 것일까.
“전쟁에 대한 기억은 일종의 쇼크가 아닐까요? 강렬한 경험은 의식을 지배하기 마련이고 그런 상황에서 기억은 사실 각자 처한 위치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죠. 그렇지만 각자의 기억에도 공통되는 부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예를 들어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경우에도 희생자와 진압군의 기억은 아주 다를 것이다. 어쩌면 모든 상황이 종료되면 그 후부터는 기억에 대한 전쟁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각자 다른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 속에서 공통점을 추출하여 진실에 근접하며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거친 후 비로소 바른 역사가 쓰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번 작업은 상징적인 부분을 많이 찾게 되니 추상적으로 가는 것 같아요.”
그 전의 작업이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실적인 작업이었다면 이젠 실체가 없는 ‘기억’을 주제로 삼으니 자연스럽게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인의 기억이 집단의 기억으로 단단해지고 그들의 기억을 통하여 전쟁을 말하는 그의 <기억 전쟁>은 40년에 걸친 강용석 작가의 전쟁 이야기도 결말 부분에 진입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쟁에 대한 기억은 일종의 쇼크가 아닐까요? 강렬한 경험은 의식을 지배하기 마련이고 그런 상황에서 기억은 사실 각자 처한 위치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죠. 그렇지만 각자의 기억에도 공통되는 부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예를 들어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경우에도 희생자와 진압군의 기억은 아주 다를 것이다. 어쩌면 모든 상황이 종료되면 그 후부터는 기억에 대한 전쟁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각자 다른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 속에서 공통점을 추출하여 진실에 근접하며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거친 후 비로소 바른 역사가 쓰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번 작업은 상징적인 부분을 많이 찾게 되니 추상적으로 가는 것 같아요.”
그 전의 작업이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실적인 작업이었다면 이젠 실체가 없는 ‘기억’을 주제로 삼으니 자연스럽게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인의 기억이 집단의 기억으로 단단해지고 그들의 기억을 통하여 전쟁을 말하는 그의 <기억 전쟁>은 40년에 걸친 강용석 작가의 전쟁 이야기도 결말 부분에 진입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기사는 2023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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