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론 ㅣ 조조,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둔전제를 시행하다
글: 방통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이보다 더한 명언이 있을까. 무슨 일이든 간에 우선 먹을 것부터 해결되야 하는 법이다. 백성이 배부르지 않으면 민심이 안정될 수 없고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면 정치가 바로 서지 않으며 정치가 바로 서지 않으면 나라가 부강해질 수 없다.
부국강병의 시작은 바로 백성을 배불리 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일찍이 관중(管仲)도 "창고가 가득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충족되야 영욕을 안다(倉廩實則知禮節, 衣食足則知榮辱)"고 했었다.
후한 말기. 말 그대로 후한은 국가가 파탄에 이른 지경이었다. 전란이 거듭되어 농지는 황폐해진 지 오래였고 백성들은 굶어 죽어갔다. 인육을 먹는 일도 있었다. 후한이라는 나라는 그 존재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에 인용된 『위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난리를 만나자 식량이 부족했다. 도처에서 군사가 일어나니 난세를 끝낼 계책이 없었다. 배고프면 침략하고 배부르면 남은 것을 버렸으니 와해하여 떠돌아다니고 대적하지 못하여 스스로 붕괴한 자가 셀 수 없었다. 원소가 하북에 있을 때 군사들이 뽕과 오디를 따 먹었고 원술이 강회에 있을 때에는 부들과 어패류로 허기를 채웠다. 백성들은 서로를 잡아 먹으니 주(州)와 마을이 황량했다(自遭荒亂,率乏糧穀. 軍並起,無終歲之計,饑則寇略,飽則棄餘,瓦解流離,無敵自破者不可勝數. 袁紹之在河北,軍人仰食桑椹. 袁術在江、淮,取給蒲蠃. 民人相食,州里蕭條)."
세력이 강대하던 원소와 원술의 군대조차 저 모양이었는데 그보다 한참 미약하던 조조는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삼국지』 「위서 정욱전」에 인용된 『세어』에는 정욱이 3일분의 식량을 조조에게 조달했는데 그 중에 인육이 섞여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조조의 군사 역시 비참한 꼴이었다. 그 외에도 조조는 서주를 칠 때 군량 문제로 철수해야 했으며 복양에서 여포와 싸울 때에도 군량 문제를 겪어야 했다.
조조가 헌제를 맞이하러 낙양에 들어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조는 조정의 신하들이 먹을 것을 찾아 직접 구하러 다니는 것을 목격했다. 거기서 절감했다. 지금 당장에 급한 건 바로 식량 해결이라는 것을.
일찍이 조조는 헌제에게「진손익표陳損益表」를 올려 지금 주요한 사안 14개조를 논하였다. 그 14개조는 지금 전하지 않고 『예문유취藝文類聚』에 서문만 남아 있는데 잠시 살펴보자.
"폐하께서 즉위하시고 다시 어리석음을 시험하셔서 등용하여주시니 마침내 상장(上將)의 임무를 받아 두 주(州)를 통솔하고 안으로는 중요한 일에 참여하여 실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한비자(韓非子)는 한나라가 쇠약해졌던 것은 부국강병에 힘쓰거나 현명한 인물을 임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애석해했습니다. 신은 별 볼일 없는 자질로 종정(鐘鼎)의 임무를 담당하였는데 어둡고 둔한 재주로써 밝은 정치를 받들겠습니다. 은혜를 되돌아보고 책임을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신이 힘을 다하여 목숨을 던질 시기이기도 합니다. 삼가 옛날의 교훈을 받들고 지금 마땅히 해야 할 14개 조항을 왼쪽과 같이 제출하겠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모두 반딧불과 같은 것이지만, 태양처럼 점차 밝아지게 될 것이니 말로는 다하기 부족합니다(陛下即祚, 復蒙試用, 遂受上將之任, 統領二州, 內參機事, 實所不堪. 昔韓非閔韓之削弱, 不務富國強兵, 用賢任能. 臣以驅驅之質, 而當鐘鼎之任, 以暗鈍之才, 而奉明明之政. 顧恩念責, 亦臣竭節投命之秋也. 謹條遵奉舊訓權時之宜十四事, 奏如左, 庶以蒸螢. 增明太陽, 言不足采)."
조조는 한비자를 예로 들면서 나라가 쇠퇴하는 건 부국강병의 시책을 사용하지 않아서라고 하였다. 부국강병이 지금 존폐 위기를 겪고 있는 후한의 과제라 여긴 것이다. 그래서 건안 원년(196) 마침내 조조는 그 첫 걸음으로 둔전제(屯田制)를 시행하였다.
그가 내린 「치둔전령置屯田令」을 보자.
“무릇 나라를 안정시키는 방법은 군대를 굳세게 하고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데에 있다. 진(秦)나라 사람(商鞅 : 상앙)은 농사일을 가장 급하게 여겨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한 무제는 둔전으로 서역 일대를 안정시켰다. 이는 앞서 살아간 사람들의 훌륭한 본보기이다(夫定國之術,在於彊兵足食,秦人以急農兼天下,孝武以屯田定西域,此先代之良式也).”
「치둔전령」에서 보이듯 둔전제는 사실 전국시대 때부터 있었다. 진나라의 상앙은 농전(農戰) 정책을 도입하여 식량 생산과 군사 증원을 계획했으며 후에 진(秦)나라 장군 몽념(蒙恬)이 흉노를 공격할 때에도 오르도스 지역에 44개 현을 세우고 백성들을 이주시켜 식량 운송 부담을 덜게 한 적도 있다. 전한 때 한 무제(漢武帝) 역시 하서 지역, 장액군 등지에서 둔전을 시행하였다. 한 선제(漢宣帝) 때의 조충국(趙充國) 역시 강족을 공격할 때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둔전을 시행했다. 후한 때 마원(馬援)도 유중에서 둔전을 행하였다.
이처럼 둔전은 예전부터 행해졌던 제도이다. 그러나 이 둔전들은 대체로 변방에서 군량 조달 문제 해결을 위한 일시적인 방편이었다. 따라서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았다. 시행된 지역도 변방 부근이 대부분이다.
후한 말기 조조말고도 독자적으로 둔전을 시행한 자들도 있다. 도겸이나 공손찬이 그들이다. 도겸은 진등(陳登)을 전농교위로 삼아 밭을 순시하고 관개용 굴착을 성공하여 메벼를 수확하였고 공손찬은 원소와 역경에서 싸울 때 둔전을 하여 군량을 얻었다고 하였다.
사실 조조도 일찍이 모개(毛玠)로부터 경작지를 정비해야 한다고 건의를 들은 적이 있다. 조조도 이를 알았지만 주변 여건이 좋지 않아 시행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허현으로 도읍을 옮기고 일전에 확보한 청주병과 황건적 잔당인 하의(何儀), 유벽(劉辟)등을 격파하면서 그 투항자들을 흡수하여 적잖은 인원 및 농기구, 소 등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조조의 둔전제를 강력히 지지한 사람은 바로 한호(韓浩), 조지(棗祗), 임준(任峻) 등이었다.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조는 군둔(軍屯)과 민둔(民屯) 두 가지를 병행하였다. 군둔은 군사의 식량을 조달하는 역할이었고 민둔은 백성들의 기아를 해결하는 역할이었다. 그동안 둔전제에서 군둔이 민둔보다 규모가 더 컸었지만 조조는 민둔의 규모를 크게 하였다.
그리고 최초로 민둔을 시행한 허현 지역에서 1백만곡의 수확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얻어냈다.
이 성과의 최대 공로자는 조지였다. 그러나 조지는 요절하고 말았다. 조조는 너무 슬퍼하면서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그의 아들에게 봉작을 내려주라는 영을 내렸다.
『삼국지』 「위서 임준전」에 인용된 『위무고사魏武故事』에 그 영이 실려 있다.
"고(故) 진류태수(陳留太守) 조지는 천성이 충직하고 능력이 있어 처음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정토(征討)를 주선하였다. 후에 원소가 기주에 있을 때 조지를 탐내어 그를 얻고자 했다. 조지는 나(孤)에게 깊이 의탁하여 이에 그로 하여금 동아(東阿)의 현령을 맡긴 것이다. 여포의 난으로 연주(兗州)가 모두 배반했지만 오직 범(范), 동아는 완전히 있었다. 이는 조지의 병사가 성을 힘으로 지켰기 때문이다. 후에 대군의 식량이 모자를 때 동아현에서 계속 얻었던 것은 조지의 공이다. 황건적을 격파하고 허현을 정하여 적으로부터 자업(資業)을 얻고 마땅히 둔전을 흥하게 일으켰다. 이 때 여러 사람들이 모두 당연히 소의 수를 계산하여 곡식을 거두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수량을 정하였다. 시행 후 조지는 소를 빌리는 것을 기준으로 곡식을 거두는 것은 곡식의 증산을 크게 줄어들게 한다고 했다. 수해나 가뭄의 재해가 있을 때에는 크게 불편하다고 했다. 반복하여 말을 해왔지만 나는 오히려 실시한 제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다시 바꿀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조지가 여전히 고집하여 나는 어떤 것을 따라야 할 지 몰랐는데 이에 순욱에게 명하여 그와 더불어 의논하게 했다. 이 때 예전에 군제주(軍祭酒)였던 후성(侯聲)이 말하기를 '관우(官牛)를 뽑고 관전(官田)을 계산하여야 합니다. 조지의 의견대로라면 관아에서 편하겠지만 백성들은 불편합니다'라고 했다. 후성이 그렇게 품고 운운한 것은 그를 의심해서이다. 조지는 오히려 자신이 있었고 계책에 근거하여 분전(分田)의 방법을 고집하였다. 나는 이내 그가 옳다고 여겨 그를 둔전도위(屯田都尉)로 삼고 밭의 사업을 시행하게 하였다. 그 해에 큰 수확이 있었으니 후에 마침내 이렇게 밭이 커지고 군사들이 풍족하게 쓸 수 있었으며 역도들을 멸하고 이겨서 천하를 평정한 것과 왕실을 높인 것은 조지의 공이 컸다. 불행히도 일찍 죽으니 추증했어야 함에도 아직 이에 부응하지 못했다. 지금 이 일을 거듭 생각하니 조지는 응당 봉작을 받아야 함에도 지금에 이르렀다. 이는 내 잘못이다. 이에 조지의 자식을 곁에 두어 마땅히 봉작을 더하고 조지를 제사지냄으로써 그의 업적을 불후지사(不朽之事)로 하라(故陳留太守 棗祗, 天性忠能. 始共舉義兵, 周旋征討. 後袁紹在冀州, 亦貪祗, 欲得之. 祗深附託於孤, 使領東阿令. 呂布之亂, 兗州皆叛, 惟范、東阿完在, 由祗以兵據城之力也. 後大軍糧乏, 得東阿以繼, 祗之功也. 及破黃巾定許, 得賊資業. 當興立屯田, 時議者皆言當計牛輸穀, 佃科以定. 施行後, 祗白以為僦牛輸穀, 大收不增穀, 有水旱災除, 大不便. 反覆來說, 孤猶以為當如故, 大收不可復改易. 祗猶執之, 孤不知所從, 使與荀令君議之. 時故軍祭酒侯聲云, 科取官牛, 為官田計. 如祗議, 於官便, 於客不便. 聲懷此云云, 以疑令君. 祗猶自信, 據計畫還白, 執分田之術. 孤乃然之, 使為屯田都尉, 施設田業. 其時歲則大收, 後遂因此大田, 豐足軍用, 摧滅羣逆, 克定天下, 以隆王室. 祗興其功, 不幸早沒, 追贈以郡, 猶未副之. 今重思之, 祗宜受封, 稽留至今, 孤之過也. 祗子處中, 宜加封爵, 以祀祗為不朽之事)."
조지가 둔전을 행하기 전까지 기존에는 관우를 빌려준 뒤 이를 기준으로 곡식을 거두는 방법을 썼다. 넓은 땅을 경작하는 자는 소를 많이 빌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많이 빌리지 않았다. 하지만 토지라는 것은 비옥한 정도가 다르니 면적당 곡식이 산출되는 양도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연재해가 있는 경우라면 풍흉에 따라 그 산출량은 줄어들 것이었다. 관우를 적게 빌린 마당에 흉작이 되고 관우를 많이 빌렸는데도 풍작인 경우가 생길 수 있었다. 그래서 관우를 기준으로 곡식을 수확하는 것은 불평등하였다. 백성들의 편의를 생각한다면 관우를 빌린 기준으로 곡식을 거두는 것은 그만 두어야 했다.
그래서 조지는 땅을 나누어 준 다음에 수확량에 따라 절반씩 나누는 방법을 채택했다. 그것이 선견지명임은 분명히 드러났다.
조지의 뒤를 이은 임준은 둔전을 전국 단위로 확대시켰다. 조조에게는 수많은 참모가 있었는데 정치 참모가 순욱, 모개, 동소, 종요이고 군사참모가 곽가, 순유, 정욱 등이라면 경제참모는 바로 임준이었다.
조조는 늘 임준에게 군사 물자와 식량을 책임지게 했다. 『삼국지』「위지 임준전」에서는 임준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군국의 풍요는 조지로부터 일어나 임준에 의해 완성되었다(軍國之饒,起於棗祗而成於峻)."
임준은 건안 9년(204)에 사망했다. 조조는 조지가 죽었을 때처럼 매우 슬퍼하였다. 임준의 뒤를 이어 둔전을 책임진 사람은 국연(國淵)이었다.
『삼국지』 「위서 국연전」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태조는 널리 둔전을 실시할 생각으로 국연을 시켜 이를 총괄하게 했다. 국연은 누차 손익을 진술하여 땅의 형세를 살피고 백성을 두어 백성의 수에 따라 관원을 두고 공과(功課)와 법을 명백하게 했다. 이에 5년 만에 창고가 가득차고 백성들은 즐거이 일을 했다(太祖欲廣置屯田,使淵典其事. 淵屢陳損益,相土處民,計民置吏,明功課之法,五年中倉廩豐實,百姓競勸樂業).”
여기서 조조는 둔전을 하는데 그 인원을 황건적 투항자들과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는 유복(劉馥)이 합비에 도착하여 이를 개간할 때 강남에서 귀순한 유민들로 둔전을 시행했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민둔과 달리 군둔은 한나라 때의 것을 발전시킨 것으로 조조가 창자(倉慈)를 수집도위로 임명하여 회남에서 처음 시행했다. 조조의 군둔은 군민에 결합해 변경을 둔전, 개간하는 방법이었다. 조조 시절에 완비되고 위나라가 건국되자 위 문제가 이를 계속 시행했다.
조조는 둔전을 행하면서 백성들의 기아문제를 완벽히 해결했고 변경의 군둔까지 완비되어 군량 걱정도 덜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식량이 남아돌게 되었다. 『진서』 「고조선제기」를 보면 건안 말기에 20만 명의 군사가 농사를 지으면서 수비에 나서니 곡식이 쌓이고 그 수요가 남아돌았다고 할 정도였다.
둔전제를 시행하면서 황건적 잔당들을 투항시켜 이들이 둔전에 종사하게끔 하니 난세의 통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조는 둔전제를 통해 강력해진 경제적 기반으로 주변 군웅들을 소탕하는데 한결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