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방통
조조는 천명이니 하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별로 따른 적이 없다. 조조가 중시했던 것은 사람이다. 그는 시 「도관산度關山」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과 땅 사이 사람이 제일 귀하구나(天地間, 人爲貴)"
그래서인지 그는 고대 사람들이 믿던 신선도 믿지 않았다. 『문선』에 실린 '조식(曹植)이 백마왕 조표(曹彪)에게 주는 시(曹子建贈白馬王彪詩)에 달린 조조의 시 구절을 보자.
"통탄스럽구나! 세상 사람들아. 신선에게 속아넘어가다니(痛哉世人, 見欺神仙)."
이처럼 조조는 미신을 믿지 않았다. 그는 또한 「추호행」에서 세상 사람들이 노자(老子)와 적송자(赤松子), 왕자교(王子喬)가 신선이 되었다고 믿자 결코 그들은 신선이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장수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보출하문행步出夏門行」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신령스러운 거북이 비록 장수해도 언젠가는 끝이 있다. 하늘로 오르는 용이 안개를 타더라도 결국은 재가 된다네(神龜雖壽, 猶有竟時. 騰蛇乘霧 終爲土灰)"
모든 생명은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조조는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귀신을 빙자하여 사기를 치고 민심을 어지럽히는 행위를 간과하지 않았다.
그는 젊은 시절 제남(齊南)의 상(相)을 지내면서 음사(淫祀)를 타파한 적이 있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직위가) 옮겨져 제남상이 되었다. 제남국에는 10여 개의 현이 있었는데 장리(長吏) 가운데 대부분이 귀족, 친척에게 아부하며 뇌물을 받고 매관매직하는 일이 횡행했으므로 상주하여 그 중 8명을 파직시키고 음사(淫祀)를 금단시켰으니 간사한 자들이 달아나 자취를 감추어 제남국의 군의 경계가 숙연해졌다(遷為濟南相,國有十餘縣,長吏多阿附貴戚,贓污狼藉,於是奏免其八, 禁斷淫祀,姦宄逃竄,郡界肅然).”
다음으로 조조는 허례허식과 음사를 모두 근절시킴으로서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었다. 한나라 성양경왕 유장(劉章)의 제사를 근절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배송지의 주에 인용된 『위서』에도 이 유장의 제사를 받드느라 백성들의 삶이 나날이 피폐해져 조조가 유장을 추모한 6백여 개의 사당을 모두 헐었다. 그 전까지 백성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제남의 토착 귀족들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던 것을 조조는 과감히 깨부순 것이다.
이후 건안 4년(199)에도 마찬가지로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사기꾼 송금생(宋金生)을 처벌한 뒤 헌제에게 표를 올린 일이 있다. 『태평어람』에 실려 있는 글이다.
"신이 전에 (군사를) 보내 하내(河內), 획가(獲嘉) 여러 지역에 주둔한 진영을 토벌하고 포로를 잡았는데 그들이 진술하기를 '하내에 귀신이면서도 사람인 송금생이 있는데 그가 여러 진영에 녹각(鹿角)을 설치하여 지킬 필요가 없으니 내가 개로 하여금 너희를 지켜주겠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은 자가 밤에 군병의 소리를 들었는데 다음 날에 진영 아래를 보니 다만 호랑이 발자국만 보였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신이 곧 부장 무맹도위(武猛都尉) 여납(呂納)에게 장병을 이끌고 가 송금생을 잡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군법에 따라 처리했습니다(臣前遣討河內獲嘉諸屯, 獲生口. 辭云, 河內有一神人宋金生. 令諸屯皆云, 鹿角不須守. 吾使狗為汝守. 不從其言者, 即夜聞有軍兵聲. 明日視屯下, 但見虎跡. 臣輒部武猛都尉呂納, 將兵掩捉得生, 輒行軍法)"
조조는 귀신을 흉내내면서 사기치는 자들에게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조조가 방술사들을 불러 모은 적은 있다. 그러나 말년에 진시황처럼 불로불사를 얻으려고 한 의도가 아니었다. 그의 의도를 살펴기 위해 조식이 지은 「변도론辨道論」을 살펴보자.
"세상에는 방사(方士)들이 있는데 우리 왕께서 이들을 불러들이시니 감릉(甘陵)에는 감시(甘始)가 있고 여강(盧江)에는 좌자(左慈)가 있으며 양성(陽城)에는 치검(郄儉)이 있었다. 감시는 기운을 끌어 들일 수 있다고 했고 좌자는 성 관계 방법에 밝았으며 치검은 곡식을 기피하는 것을 잘한다고 했으며 모두 자신들이 수백 살을 살았다고 말했다. 본래 그들을 위나라로 불러 모은 것은 정말로 이 무리들이 간사하게 속이면서 백성들을 기만학 요사스러운 악행으로 백성을 미혹시킬까 두려워서였으니 고로 이들을 모아 그런 짓을 못하도록 한 것이다. 어찌 영주(瀛洲)의 신선을, 바닷가에서 안기(安期)를, 금로(金輅)를 버리고 구름 수레를 돌아보고자, 문기(文驥)를 버리고 나는 용을 얻고 싶어서였겠는가. 대왕과 태자부터 나의 형제들까지 모두 이를 조소하고 믿지 않았다(世有方士, 吾王悉所招致, 甘陵有甘始, 盧江有左慈, 陽城有郄儉. 始能行氣導引, 慈曉房中之術, 儉善辟穀, 悉號數百歲. 本所以集之於魏國者, 誠恐此人之徒, 接姦詭以欺眾, 行妖惡以惑民, 故聚而禁之也. 豈復欲觀神仙於瀛洲, 求安期於邊海, 釋金輅而顧雲輿, 棄文驥而求飛龍哉. 自家王與太子及余兄弟, 咸以為調笑, 不信之矣)"
좌자의 장기는 방중술이었다. 이것에 능통했다고 한다고 말하고 다니면서 그 짓을 해야 오래 산다고 백성들에게 말하고 다닌다면 자연히 문란한 풍습이 생기는 한 요인이 될 게 뻔했다.
이렇듯 조조가 좌자나 감시, 치검 등 소위 방술사라 불리는 자들을 모은 건 이들이 사이비 종교처럼 괜한 헛소리를 퍼뜨리면서 백성들을 미혹시킬까봐 염려해서였다.
아무튼 조조는 이런 미신을 금하는데 노력했다.
『손자병법』「구지편」에 주석을 달 때에도 마찬가지 태도를 보였다. 손자가 "병사들 사이에 점과 같은 미신을 금하고 유언비어를 막으면 승리의 확신을 품고 죽음에 이르더라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으니 조조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요사스러운 미신으로 가득 찬 말을 금하고 병사들을 의혹의 계책을 제거한다(曹公曰, 禁妖祥之言, 去疑惑之計)."
또한 『손자병법』「용간편」에서는 손자가 "적의 정황은 귀신의 도움을 받거나 장수의 경험에 비추어 보고 추측할 것도 아니며 더욱이 별자리를 보고 점을 쳐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니 조조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 정보를 구하는 것은 불가하며 또한 일을 유추하여 (정보를) 구한다는 것도 무리이다(曹公曰, 不可以禱祀而求, 亦不可以事類而求也)."
지금도 미신이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데 하물며 고대 사회는 더욱 말할 나위 없다. 조조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공자가 괴력난신을 믿지 않았던 사실을 알고 군율을 어지럽히거나 백성들을 어지럽힌 미신을 하나하나 제거했다.
그렇다고 해서 조조는 의례적인 제사까지는 반대하지 않았다. 「포상령褒賞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별부사마(別部司馬)가 제 환공(齊桓公)의 신당을 세울 것을 요청했으니 기실(記室) 완우(阮瑀)로 하여금 이 일을 의논하도록 하라(別部司馬請立桓公神堂, 使記室阮瑀議之)"
옛 제왕의 업적을 기리는 제사의 경우에는 미신이 아니었으므로 이런 제사는 특별히 허락했다. 그러나 조조는 아들 조충(曹沖)이 요절했을 때 너무 슬퍼한 나머지 사공연 병원(邴原)의 죽은 딸과 영혼결혼을 시키고 싶어했다.
음사를 척결하던 모습과 모순되는 행동이었다. 이 일은 병원이 죽은 사람에 대한 예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하여 성사되지는 않았다.
조조는 누차 미신을 경계하면서 이를 근절시키기 위해 노력했었다. 당연히 영혼결혼도 미신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식을 일찍 떠나보낸 한 사람의 아버지였다.
그 때만큼은 그저 아버지로서 죽은 자식에 대한 슬픔을 이기지 못해 그런 일을 생각하기에 이른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