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방통
때때로 사람들은 조조를 법가로 분류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진수도 「무제기」에서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의 법술을 사용했다'고 평했기 때문이다.
군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손자병법』 「모공편」에 주석을 달 때에도 "예(禮)로는 병사를 다스릴 수 없다"고 하여 그가 얼마나 법치를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조조가 정치에서나 군사에서나 모두 법치를 행한 인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걸로 조조가 법치만을 행한 각박한 인물이라고 단정지어서는 곤란하다.
우선 『손자병법』에서 조조가 주석을 달았던 '예'라는 것은 순자(荀子)가 말한 예치(禮治)라고 할 수 있다. 예치는 인의로 통치하는 덕치와 법으로 다스리는 법치의 중간이다. 조조가 말한 '예로 병사를 다스릴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은 병사를 운용함에 있어서 엄격한 법이 있어야 된다고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그의 통치사상까지 100% 법치가 될 수는 없다. 적어도 군사에서는 법치였으되 정치에서는 덕치와 법치를 혼용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조조는 순자의 정치사상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다. 『순자』「왕패王覇」편을 보면 순자는 예를 통한 감화를 우선으로 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에 법치를 사용하라고 하였다.
중국의 역대왕조들은 모두 겉으로는 왕도(덕치)를 행하면서도 속으로는 패도(법치)를 구사했다. 원래 치세에는 덕치가 우선이고 난세에는 법치가 우선인 법이다.
이 두 가지를 잘 운용하는 지도자야말로 가장 우수한 지도자라 평할 수 있다. 삼국시대는 난세였다. 질서가 어지러우니 당연히 질서를 잡아야 하는 법.
조조는 그래서 군율을 엄격히 하고 법 집행도 엄혹하게 했다.
이 당연한 이치를 간과한 채 일부 사람들은 조조가 가혹했다고만 말한다. 그러면서 제갈량이 촉에서 법을 엄격하게 집행한 것에 대해서는 잘했다고 말한다. 이중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조조가 융통성 없이 법에 엄격하기만 했을까? 그것도 옳은 말은 아니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겠다.
『삼국지』 「위서 노육전」을 보면 전쟁 중에 도망친 병사가 있었는데 형을 집행하는 관리가 그 병사의 아내인 백씨(白氏)를 연좌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백씨와 도망간 병사는 오랜 부부가 아닌 이제 막 부부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자 노육이 조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릇 여인의 감정은 남편과 직접 만난 후 애정이 생기고 부인이 된 후에 의리가 두터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경』에서도 '그대를 보지 못하니 나의 마음이 슬프구나. 그대를 본 후에 나의 마음이 편하구나' 라고 한 것입니다. 또 『예기』에서는 '선조를 제사지내는 사당에 가지 않은 부인이 죽으면 그 여자의 집으로 돌려보내 안장시키고 부인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백씨 등은 살아서는 남편을 만나지 못하는 슬픔이 있고 죽어서는 부인이 되지 못한 통한이 있게 될 텐데 관리들이 그녀를 사형에 처하려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부부가 된 후에는 어떤 죄를 더할 것입니까. 『예기』에서는 '형벌을 시행할 때 가볍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의 죄를 다스릴 때에 가벼운 것을 따르라는 말입니다. 또 『상서』에서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느니 차라리 판결을 가볍게 하여 조문을 좇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이는 형벌의 무거움을 경계한 말입니다. 백씨 등이 모두 예빙(禮聘)을 받아 이미 남편의 집으로 갔다면 그녀를 형벌에 처벌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처벌한다는 것은 형벌이 너무 무겁습니다."
조조는 노육의 말에 따라 백씨를 처벌하지 않았고 노육을 법조의령사(法曹議令史)에 임명하여 억울한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게 했다.
또 한가지 일화.
『삼국지』 「위서 만총전」에 보면 만총(滿寵)이 허현의 현령으로 있을 때 조홍(曹洪)의 빈객 중 한 명이 자주 법을 어겨 문제를 일으켰다. 만총이 그를 체포했는데 조홍이 만총에게 그를 감면시켜줄 것을 청했지만 만총은 거절했다. 조홍이 조조에게 이를 말하였는데 만총은 조조가 그를 용서할까봐 빈객을 죽였다. 조조가 그 얘기를 듣고 만총을 칭찬했다.
"일을 하려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조조는 법 집행을 공평하게 하기 위해 가까운 자의 실수라도 사사로운 정을 두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울러 조조는 자기 자신에게도 벌을 내린 적이 있다. 행군 도중에 병사들에게 백성들의 보리밭을 망치지 말라고 지시했는데 공교롭게도 조조의 말이 보리밭 사이로 뛰어들어 자신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 자신에게도 엄격했음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 일화는 『조만전』이 출전이라 신빙성이 의심스럽기는 하다. 『조만전』은 기본적으로 조조를 폄하하기 위해 쓴 글이다. 아마도 『조만전』의 저자는 일부러 조조가 보리밭에 뛰어들어 스스로 형벌을 가함으로써 병사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주작질을 벌였다 라는 식으로 이런 일화를 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조의 기본적인 법 의식을 볼 때 그런 일까지 벌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닌데 그들을 전부 속일만한 행동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다소 신빙성이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이는 액면 그대로 조조가 자신에게도 엄격했다는 일화로 해석하는 게 가장 무방할 듯 하다.
조조가 내놓은 법령 중에는 후장(厚葬)을 금하거나 사적인 복수를 금하는 내용도 있다. 당시 이데올로기인 '효'와 배치되는 조치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각박하다고 여겼을 지 모른다.
그러나 후장은 이미 묵가에 의해 공격을 받은 적이 있는 풍습이었다. 장례 때 비효율적인 비용을 들게 하는 후장은 난세에는 좋은 풍습이 될 수 없었다. 사적인 복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적인 복수가 횡행할 경우 치안이 어지러워 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조조는 질서를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기존의 관행을 깰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조는 궁극적으로 왕도를 제창한 지도자이다. 그가 영(令)을 내릴 때 자주 인용하는 경전이 바로 『논어』이다. 『조조평전』을 저술한 장쭤야오 선생은 이러한 조조의 행보가 모순적이라고 말하였지만 이는 앞서 말했듯이 모순이 아니라 덕치와 법치를 병행한 것으로 말해야 정확하다.
조조의 통치술은 건안 19년(214)에 승상이조연(丞相理曹掾) 고유(高柔)에게 내린 글에서 잘 나타난다.
"무릇 치정(治定)을 함에는 예(禮)를 으뜸으로 하고 발란(撥亂)을 평정함에는 형(刑)을 먼저하오. 이에 순 임금은 사흉(四凶)을 유배보내고 고요(皋陶)는 선비들을 길렀던 것이오. 한 고조가 진(秦)나라의 가혹한 법을 제거하고 소하(蕭何)가 율(律)을 정하였소. 이조연은 공평하고 타당함을 알고 헌법에 밝아야 하오.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에 힘쓰시오(夫治定之化, 以禮為首. 撥亂之政, 以刑為先. 是以舜流四凶族, 皋陶作士. 漢祖除秦苛法, 蕭何定律. 掾清識平當, 明于憲典, 勉恤之哉.)."
치세에는 예치로, 난세에는 법치를 우선시한다는 게 조조가 주장한 통치술의 골자이다. 앞서 말한 순자의 왕패사상과 일치한다. 순자는 공자 이후의 유가를 집대성한 유학자이다. 지금은 맹자를 공자의 뒤를 잇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맹자는 왕도사상에만 치우치며 다분히 공자의 사상을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오히려 순자야말로 공자의 사상에 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관중(管仲)에 대한 평가에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공자와 순자는 춘추5패의 업적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관중의 업적에 긍정적이다. 그러나 맹자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조조는 그런 면에서 가깝게는 순자, 멀게는 공자의 사상과 연결된다. 그의 시 「선재행」을 보자.
고공단보(古公亶父)는 덕을 쌓고 인을 베풀며
한결같은 도를 펼치고 빈 땅에서 다스리셨다.
태백(太伯)과 중옹(仲雍)은 천자의 덕으로
만세에 길이 본보기가 되었으니 몸에 문신을 새기셨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옛날 현자들로
나라를 양보하고 수양산에서 굶어죽었다.
지혜롭구나 산보(山甫)여. 선왕을 도왔구나.
어찌 두백(杜伯)을 등용하여 우리 성현에 누를 끼쳤는가.
제 환공(齊桓公)의 패업은 중보(仲父)가 도왔구나.
뒤에 수조(豎刁)를 임용하니 미물들도 떠났도다.
안평중(晏平仲)은 덕을 쌓고 인을 겸하였는데
세상과 더불어 덕을 숨기니 운명만은 아닐 것이라.
공자께서 살아계실 때 천자를 떠받들어
제도를 따라 의례를 행하고 벼슬길에 있었다.
주나라 선조인 고공단보부터 태백, 중옹, 백이, 숙제 등 유가에서 추앙하는 현자들의 덕을 기리면서 동시에 제 환공과 관중의 업적을 그들과 같은 선상에 놓고 있다. 그 뒤에 안자와 공자가 나온다.
이는 곧 조조가 유가에서 말하는 왕도와 법가에서 말하는 패도 두 가지의 업적을 모두 다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가 공자, 순자와 비슷한 인식이 있다는 증거가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 조조에 대해 글을 쓸 때 조조가 왕도와 패도를 둘 다 겸한다고 평가했었다.
조조가 내린 「예양령禮讓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속담에서 이르기를 '예를 한 치 양보하면 예를 한 자 얻는다'고 하였다. 이는 경전의 요지와 부합한다(里諺曰, 讓禮一寸, 得禮一尺. 斯合經之要矣)"
그가 기본적으로 예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글이라 하겠다.
조조는 건안 8년(203)에 「수학령修學令」을 내렸다.
"상란(喪亂)이 난 지 10년하고도 5년이다. 후생(後生)들은 인의와 예양의 풍속을 보지 못하니 나는 매우 상심이 크다. 명하노니 군국(郡國)은 각기 문학을 닦고 현(縣)에서는 5백 호당 교관(校官)을 두어 마을에서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고 학문을 가르치게 하라. 그리하면 거의 선왕의 도가 폐해지지 않을 것이고 천하에 도움이 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喪亂已來, 十有五年. 後生者不見仁義禮讓之風, 吾甚傷之. 其令郡國各脩文學, 縣滿五百戶置校官, 選其鄉之俊造而教學之. 庶幾先王之道不廢, 而有以益于天下)"
이 「수학령」은 조조의 교육 통치 방침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조조는 예교를 부활시키기 위해 매우 고심했었다. 그래서 그는 유학자들 양성에 매우 주력했다.
『삼국지』 「위서 노육전」에 인용된 『속한서續漢書』을 보면 조조는 노육의 아버지인 노식(盧植)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고(故) 북중랑장(北中郎將) 노식은 명성이 해내(海內)에 저명하고 학문은 유가의 으뜸이 되어 선비들이 모방하고자 하였으니 곧 나라의 기둥이었다(故北中郎將盧植, 名著海內, 學為儒宗, 士之楷模, 乃國之楨幹也.)"
또한 양준(楊俊)을 남양태수에 임명할 때에는 "덕으로 교화시킬 것"을 당부하였으며 양무(凉茂)는 조조가 하북을 평정하자 "전적(典籍)들을 편수하고 성현의 가르침을 밝혀 보고 듣고 하는 기풍을 넓힌다면 멀리서도 덕에 감화되어 귀복해 올 것"이라며 왕도를 주장했다.
이처럼 조조는 왕도를 실천하기 위한 명령을 내렸으며 양무와 같은 왕도주의자들도 모두 포용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대충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조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왕도였다. 그러나 그는 난세를 잠식시키기 위해 차선책인 가혹한 법령도 동원하였다. 군법은 엄격하였고 법 집행도 매서웠다.
그러나 하북이 평정되자 곧바로 통치술을 바꾸어 유교정치를 시행했다. 학교를 세우고 유가 경전을 익히게 하여 학문을 장려했다.
조조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걸고 넘어지는 이유 중 하나가 공융(孔融)을 죽였다는 것이다. 공융은 왜 죽임을 당했을까.
『후한서』 「공융전」을 보면 공융은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식에게 아비는 어떤 존재인가? 본래 뜻을 논하면 실로 자식은 그 부친의 정욕이 만들어낸 물건에 불과할 뿐이다. 자식은 어미에게 어떤 존재인가? 비유하건대 병 속에 물건을 넣어두었다가 꺼내는 바로 분리되는 물건과 같다.(父之於子, 當有何親. 論其本意, 實為情欲發耳. 子之於母, 亦復奚為. 譬如寄物缻中, 出則離矣)"
이는 승상군모제주(丞相軍謀祭酒) 노수(路粹)가 올린 표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공융이 그런 뉘앙스의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제멋대로라지만 천륜을 그런 식으로 비하하고 입을 턴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 된다. 적어도 사람의 탈을 쓰고 있다면 말이다.
공융이야말로 당시 이데올로기인 "효"를 폄훼한 위선자이다. 그는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그에 비해 조조는 어떠했을까.
그는 사적인 복수나 후장 풍습 금지 등 겉으로는 당시 이데올로기인 "효" 사상에서 벗어나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그러나 이는 틀렸다.
앞서 말했듯 사적인 복수를 허용할 경우 치안은 불안해진다. 오늘날에도 사적인 복수는 허용이 안 된다. 죄를 벌하려면 법대로 처벌해야 한다. 후장 풍습도 마찬가지이다. 장례를 후하게 치르는 것이 효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정작 산 사람들은 가세가 기울고 굶어죽게 된다. 경제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이미 묵가에서 유가를 공격할 때 주요한 논거가 바로 후장이었다. 당장에 먹고 살기 힘든 백성들을 위해서라면 후장 풍습은 금하는 게 오히려 나았다.
조조는 기본적으로 효를 중시했다. 진궁을 참수할 때도 진궁의 노모를 극진히 모셨으며 부모가 여포에게 인질로 잡혀 배반했던 필심(畢諶)을 다시 등용하여 노국상(魯國相)으로 삼았다.
나관중은 조조가 서서(徐庶)의 노모를 인질로 잡고 서서를 불러들였던 것처럼 묘사했지만 이는 나관중의 왜곡이다. 그렇게 따지면 『삼국연의』에서 강유(姜維)의 어머니를 먼저 잡고 강유의 투항을 유도한 제갈량(諸葛亮)도 비난 받아야 할 일인데 나관중은 그 점은 무시했다. (물론 강유의 어머니가 제갈량 진영에 잡혀 강유가 투항했다는 건 허구이다.)
충(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조조는 비록 적이었을지라도 자신의 주군을 위해 절개를 지키려 했던 인물들을 좋아했다. 그래서 원담(袁譚)이 죽자 통곡을 한 왕수(王修), 원상(袁尙)이 죽자 상복을 입은 견초(牽招), 유표(劉表)가 죽은 후 한참 뒤에야 투항을 한 문빙(文聘)도 모두 충신이라 칭찬하면서 중용했다.
조조는 이렇게 대체로 실리에 입각하여 통치를 함과 동시에 천하가 모두 평정될 경우 이상적인 왕도 정치를 행하기 위해 조금씩 포석을 깔아 두었던 것이다.
엄격한 법치를 시행했으나 융통성 있는 집행, 난세를 평정 후 치세가 다가오면 왕도를 시행하고자 한 통치 전략.
조조만이 가지고 있었던 통치술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