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灣窯자기


광동성廣東省의 불산(佛山, Fo-shan)은 역대로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고 적지 않은 명장名匠이 존재하여 이곳에는 유명한 공예품이 많았다. 석만의 도기중에 "석만의 기와는 천하의 으뜸이다(石灣瓦,甲天下)"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석만 도자소조陶瓷塑造의 역사는 유구하고 대대로 계승되어, 가작佳作이 많고 형신形神이 겸비되어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석만도자는 일찍이 신석기시대말기의 패구貝丘유적지에서 도자제작의 서막을 열었으며, 대형의 요지가 출현한 시기는 아무리 늦어도 당대唐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50-70년대에 불산佛山의 석만石灣과 남해南海의 기석奇石에서 당송唐宋시기의 요지가 발견되어 반도자기半陶瓷器에 속하는 기물이 발굴되었는바, 소성온도가 비교적 낮고 경도가 높지 않으며 배태가 중후하고 태질이 성근 전형적인 당대唐代의 남방도기에 속하였다.

한대漢代이후 상업이 점차로 발달하고 화폐의 유통량이 증가하게 되자 동銅이 화폐의 주조에 많이 사용되어 동질銅質의 일용품이 도기로 대부분 대체되었다. 이에 도자업이 흥성하여 도예가 장족의 발전을 이룩하고 도자업이 독립적인 수공업으로 형성되었으며, 도기가 시장의 상품으로 되었다.

석만예술도기의 생산은 당대唐代에 시작되었다. 당대 석만요의 도기제작에는 평면이 타원형에 가까운 만두요饅頭窯가 사용되었다. 유색釉色은 청유靑釉가 주이며 장유醬釉가 그 다음이었다. 제작기술과 공예에는 윤제輪制와 수륜겸제手輪兼制가 병용되었다. 생산품은 일용기물이 대부분으로 완碗, 접시, 호壺와 부장용의 키가 큰 도단陶壇 및 삼족향로三足香爐 등이 많이 보이는 품종이었다.

당대唐代이전의 사람들은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았으므로, 기물은 대부분 지상에 직접 놓이게 되어, 귀를 달아 끈에 꿰어 휴대하기 편리하도록 제작되었다. 당대唐代이후에 가구가 존재하게 되어, 초기의 상床에서 후기의 탁자에 이르기까지 기물은 상이나 탁자 위에 놓고 손으로 직접 잡게 되었으므로, 끈으로 귀를 꿰어서 들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당대이전의 기형은 대부분 동물을 본떠 제작하였으며, 당대이후에는 식물을 모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당말唐末이후 도자기의 조형은 간결우미하고 다양한 양식으로 발전하여, 호壺는 대부분 물을 담는 입구인 호구壺口가 길고 주둥이와 손잡이는 호구壺口와 거의 평행을 이루었으며, 호의 몸체는 왕왕 과릉형瓜稜形으로 만들어졌고, 매병梅甁과 옥호춘병玉壺春甁 등의 형태가 출현하였다. 완碗에는 과릉형瓜稜形, 규화형葵花形이 나타났으며, 두립형(斗笠形-삿갓형)이 가장 유행하였다.

송대宋代는 도자의 전성기로 전 사회의 소비풍조가 도자업의 공전절후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도자제작에 종사하는 요지가 전국에 두두 분포하여, 일용도자와 건축용도자 및 예술도자의 품종이 급격히 증가되었으며, 조형과 양식이 날로 새로워져서 후세에 "唐八百, 宋三千(당대에는 팔백여가지, 송대에는 삼천여가지의 품종)"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유리기와의 출현은 석만도예의 면모를 확립시켰으며, 이 것은 매우 중시되었지만 밀실에 수장할 필요는 없는 기물이었다.

송대에는 유색釉色도 전시대보다 훨씬 풍부하여졌다. 전통적인 황유와 흑유 및 청유를 제외하고도 채색유彩色釉, 화유花釉, 요변유窯變釉 등이 창조되었다. 장식문양도 더욱 신기하고 다양해졌으며 각화, 획화, 인화, 회화, 퇴첩堆貼, 부조 및 나뭇잎과 전지첩식剪紙貼飾 등의 장식수법도 더욱 풍부하고 다채로워졌다. 도자기의 생산은 송대의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생산의 한 부문으로 수출상품의 절대다수가 도자기였다. 대외무역의 확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도자업은 점차 내지에서 연해지역의 절강浙江과 복건福建, 광동廣東, 광서廣西로 발전되었다.

이 당시 석만도자업의 발전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요소가 있었으니, 편리한 교통과 비교적 풍부한 도토陶土이다. 관요官窯의 제품을 수송하는 수로가 점차로 얕아지게 되자 수운교통의 중심이 부득이하게 불산佛山과 석만石灣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불산과 석만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분강汾江과 동평하東平河는 광주廣州와 직접 통하므로 생산품을 광주로 운반하여 수출하기 매우 편리하였다. 대만臺灣일대에는 또 도니강사(陶泥崗沙-도자기 제조용의 진흙과 모래)가 존재하여 도자재료의 채취가 편리하였으므로, 본래 도자업의 기초를 구비하고 있었던 석만은 아주 신속하게 영남의 중요한 도자생산기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송대宋代 석만에서 생산한 일용도기는 조형과 장식수법에 예술적인 표현형식을 주입시켜, 기형이 풍만하고 균형이 잡혀 있으면서 선이 유창하고 변화가 풍부하였다. 종류도 당대唐代보다 더욱 풍부하여져서 혼단魂壇, 퇴첩와담중첩식왜신도관堆貼瓦擔重疊式矮身陶罐, 채회화병彩繪花甁, 도금陶琴 등이 제작되었으며, 기물과 문방구와 동물 및 인물 등의 각종 도소陶塑도 포함되어 있다. 석만의 도기로 제작된 오현금五絃琴은 대만의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는데, 책상머리에 두는 문방구류 도소의 가작이다.

송대 석만도기의 장식에서는 문양장식을 극히 중시하였다. 문양의 제재는 광범위하고 형상은 풍부하면서 극히 정밀하게 제작되어 상당히 높은 예술적인 수준에 도달하였다. 석만의 송대宋代의 무덤과 기석奇石의 송대宋代의 요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면, 송대宋代의 채색하여 그려진 화훼문양에는 사의화寫意畵의 필의筆意가 함유되어 있으며, 난초와 대나무의 잎 등은 용필用筆이 간결하면서 정취가 가득하다. 이 밖에 또 승문繩紋, 현문弦紋, 파랑문波浪紋, 과릉문瓜稜紋, 전지화훼문纏枝花卉紋, 이방연속문(二方連續紋-두 개의 사각형이 서로 이어진 문양) 등이 있다.

석만도자는 자주요의 장식수법을 흡수하여 도기의 배체에 화장토를 칠하고 각획刻劃하거나 날소捏塑하여, 원래는 실용적인 기능 만을 가지고 있었던 일용기물의 격조를 크게 제고시켰다. 그 가운데 전지화훼문은 극히 정미하여 화훼의 줄기가 자연스럽게 벋고 적당히 구부러지게 표현되어 장식된 식물의 구부러짐(曲), 펼쳐짐(伸), 말림(卷), 뒤엉킴(纏)이 모두 대자연의 왕성한 생명력을 함축하고 있다.

석만은 중국남방의 한 모퉁이에 위치하여 일용도자의 생산을 위주로 하였으며, 도자제작기술은 비록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였으나 북방의 여러 요지와 비교할 경우에 크게 손색이 있어, 송대의 도자업에서 현저한 지위를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남송에서 원에 이르는 시기에 도자기예가 서로 융화되어 석만도자제조의 수준과 예술적인 수준이 크게 제고되었다. 이로 인하여 "석만은 송대 각 명요를 집대성하여" 정요, 여요, 관요, 가요, 균요의 여러 명요의 제품이 석만에서 극히 유사하게 모방제작되었으며, 팔대자계八大瓷係의 조형과 유색釉色의 아름다움 및 장식수단도 모두 석만요에 흡수되어 남부지역에서 모방제작에 뛰어난 점을 특색으로 하게 되었으며, 특히 '광균廣鈞'과 '니균泥鈞'은 천하에 명성을 날렸다. 석만도자는 창작과정에서 끊임없이 각 명요의 공예특징을 차감하여 운용하였다.

민요인 석만도자은 줄곧 광대한 백성의 수요에 부응하였으므로 도소예술은 모두 실용을 원칙으로 하면서 수미秀美함과 실용성을 하나로 결합하여 현저한 장식특징을 드러내게 되었다.
석만도소예술과 건축의 관계는 더욱 밀접하여 사당祠堂이나 묘우廟宇나 일부 건축의 장식수요에 부응하여 화분, 어항, 화좌花座, 화창花窓, 영벽影壁 등의 제작예술이 발전하였다.
또한 종교활동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석만요에서는 대량으로 각종 조상造像과 문신門神을 제작하였다. 석만요에서 후대의 관상용과 완상용의 도소예술은 실용성이 매우 강한 예술에서 탈태환골하여 나온 것이므로 실용적인 흔적도 띠고 있다.

석만의 많은 도공들은 송원宋元시기의 관요官窯와 균요鈞窯제조자의 직계후예들이다. 석만요는 광주의 요窯이므로 '광균廣鈞'이라고도 칭한다. 석만요에서는 균요를 모방한 것을 제외하고도, 후에 광범위하게 기타 명요의 유색을 모방하여, 가요哥窯의 '빙렬문'과 용천요龍泉窯의 '매자청梅子靑'과 건요建窯의 '자고반'과 자주요의 '철수화鐵繡花' 및 여요汝窯의 '유리록琉璃綠' 등을 제작하였다.

석만의 삼채三彩화병은 시유공예에 있어 당삼채의 풍격을 흡수하였다. 재질의 차이와 소성온도의 차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거칠고 순박한 예술특색을 형성하였다.

명대明代부터 석만에서는 과거에 단일하게 일용도자를 수출하는 상황에서 탈피하였다. 예술도자와 건축도자 및 수공업용의 도기 등도 끊임없이 수출하였으며, 더욱이 건축도자는 동남아인들의 환영을 많이 받았다. 현재에도 동남아의 각 지역 및 홍콩, 마카오, 대만의 묘우廟宇와 사원의 기와 가운데에 석만에서 제조한 기와가 완전하게 보존된 것이 백여 곳에 달하여, 건축용의 장식품은 통계를 낼 수가 없다.

명대이후 도자의 종류와 제재는 점차 확대되어 고기잡이, 나무하기, 농사, 글 공부, 목축, 바둑두기, 술마시기, 거문고 타기, 유희하는 모습, 모기를 잡는 모습, 가려운 데 긁는 모습, 귀 후비는 모습 등처럼 백성들의 일상적인 노동행위와 생활풍경 및 각 종류의 화조충어花鳥蟲魚, 야수가축野獸家畜 및 채소과일 등처럼 백성들이 흔히 접하는 사물 그리고 달마와 나한, 관음, 수성壽星, 제공濟公, 팔선八仙, 종규, 관우關羽 등처럼 백성들이 잘 알고 좋아하는 신선이나 역사적인 인물들이 모두 석만의 예술도자 속에서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포충폄간(褒忠貶奸-충신을 표창하고 간신을 비난), 부정질사(扶正嫉邪-정도를 떠 받치고 사도를 제거함), 기복구안(祈福求安-복을 빌어 구함), 존로애유(尊老愛幼-노인을 높이고 어린이를 사랑함) 등처럼 백성들의 도덕적인 관념 및 사회적인 생활태도가 석만의 도소예술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듯이 체현되었다.

예를 들면, 청말에 출현하였던 유럽침략자의 형상을 외부의 조형으로 표현한 오줌통은 중국인들의 외침에 반항하는 사회풍조를 표현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석만도소의 제재를 "한 부의 농축된 중국 민속문화의 백과전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石灣窯자기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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